[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⑬ 양산의 햇살 좋은 우리집
엄마 대신 살림을 하며
‘싱크대’가 집의 첫 판타지
독립 뒤 통창 있는 집 꿈꿔
결혼하며 공단 옆 아파트 마련
햇살 잘 드는 베란다서 글 쓰며
시세가 떨어져도 행복하네
⑬ 양산의 햇살 좋은 우리집
엄마 대신 살림을 하며
‘싱크대’가 집의 첫 판타지
독립 뒤 통창 있는 집 꿈꿔
결혼하며 공단 옆 아파트 마련
햇살 잘 드는 베란다서 글 쓰며
시세가 떨어져도 행복하네

경남 양산 김비씨 집의 베란다 창에서 바라본 풍경. 햇살이 잘 드는 베란다는 김비씨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공간이다. 김비 제공
집 쓰다듬으며 ‘잘 살아보자’ 마당 한가운데 수돗가에 매달려 손을 호호 불며 쌀을 씻고 빨래를 했던 어린 나는 그래서 겨울만 되면 손가락 열개가 빨갛게 얼었는데, 이불 밑에 손을 밀어 넣으면 저릿저릿 살 속으로 밀려드는 따가운 온기에 눈물이 핑 돌곤 했다. 몇년 뒤 유난히 넓기만 했던 마루에 문을 달고 비닐로 모두 막아 연탄난로를 놓고서 마침내 수도를 집 안으로 들이는 공사를 했을 때, 실내에서 콸콸 쏟아지는 수도꼭지 앞을 한참 서성거렸다. 다시 물을 틀어보고 또 틀어보며, 그날은 연탄난로 앞 두칸짜리 싱크대가 나의 천국이었다. 집을 나오고 월세살이를 시작하면서, 집은 판타지를 꿈꿀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손바닥만한 월세방에는 꿈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믿었다. 워낙 가난했고 또 불안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삶이다 보니, 20대 시절은 온통 피로뿐이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꿈을 꾸고 살까, 가족이든 성별이든 동질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다면, 꿈꾸는 일은 원래 가능하지 않은 걸까. 나는 슈퍼싱글 침대 하나를 놓으면 꽉 차는 단칸방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생의 근원을 찾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물론 답은 없었다. 이불을 싸안고 드러누워 찾을 수 있는 해답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학원에서 일을 얻고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원룸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갖게 된 집에 대한 판타지는 ‘통창’이었다. 집이 좁아도 좋으니까, 방이 몇개 없어도 괜찮으니까, 밖으로 환하게 열린 통창이 있는 집에 살고 싶었다. 직장인들을 위한 주거용 원룸이라는 것이 왜 꼭 그래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대부분 창문은 너무 작았고 통창이라고 해봐야 앞 건물과 딱 붙어 있었다. 새파란 하늘 대신 앞 건물의 옥상이 보였고,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바람이 아니라 담배 연기가 곳곳에서 흘러들었다. 창이 있었지만 창을 열어도 연 것 같지 않았고, 짐을 넣을 곳이 없어 이사 갈 때마다 버릴 것을 염두에 두고 가장 싸고 허름한 물건을 골라야 했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집이 아니라, 집을 위해 나의 생활이 맞춰졌다. 집 하나가 내 삶의 전부일 리 없는데, 집이 좁으니 생각이나 마음도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김비씨의 남편 박조건형씨가 경남 양산에 마련한 아파트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선반을 조립하고 있다. 김비 제공

김비씨의 남편 박조건형씨가 경남 양산에 마련한 아파트에 처음 이사 왔을 때, 등을 달고 있다. 김비 제공
8천만원대? 껄껄 웃었네 티브이를 켤 때마다 집값 이야기가 온통 도배를 하는 요즘, 그래서 우리 아파트 집값은 어떻게 되었나 살펴보았다. 그때도 이렇게 싼 집이 있을 수 있나 싶었는데, 어느새 더 내려갔다. 신랑과 나는 8천만원대가 되어버린 우리 아파트 가격 앞에 껄껄 웃고 말았다. 섭섭하거나 속상하지는 않았다. 우린 이곳에서 4년째 살며, 같이 책을 여러권 냈고, 건강도 좋아졌으며, 좋은 일들이 참 많았다. 이웃들은 다정하고 품이 넓었으며 환하게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신랑은 앞으로 몇십년은 이 집에서 계속 살겠다고 벌써부터 다짐하는 중이다. 나 역시 우리 두 사람의 집에 불만은 없다. 일 때문에 며칠 서울로 갔다가 돌아오는 날에는 저절로 ‘우리 집이 최고지!’ 외치게 된다. 언젠가 이 집과 헤어질 날이 올까? 아마 그렇게 된다면 많은 것들이 그리워질 것 같다. 저 햇살, 저 산자락, 저기 뿌옇게 마을을 뒤덮은 안개, 비구름. 오늘도 우리는 언젠가 그리워지게 될 그리움을 집 안 곳곳 새기며 산다.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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