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전 정말 엉망진창인가요?”
과학 시간에 몰래 스페인어 책을 꺼내놓고 공부하다가 들킨 준형이가 교사의 지도를 받고 나를 만나자 자조하듯 말을 건넸다. “선생님께 지적받고 나니 후회하는 마음이 드니?” “저는 뭘 해도 다 틀린 것 같아요.” “과학 시간에 스페인어를 공부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 “네,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학교에서는 찾기가 어려웠니?” “네, 사춘기를 지나면서 친구 관계에 깊이 빠져 있다 보니 공부가 부족해졌어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한 과목이라도 잘해보고 싶어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한 수학을 열심히 공부했어요. 기초가 부족해 학교 진도를 따라가기가 어려워 부모님께 부탁해 과외까지 받으며 공부하니 몇달 만에 꽤 괜찮은 성적을 냈어요. 차츰차츰 올라가는 성적을 보니 재미가 붙어 줄곧 수학 공부만 했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반기던 부모님이 1년이 넘도록 수학 공부만 하는 저를 이해하지 못하셨어요. 점차 다른 과목에도 관심을 두고 잘할 거라고 기대하신 것 같아요.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시험 결과를 받아보신 부모님은 ‘한 과목만 잘한다고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게 아니니 이제 공부는 접고 착실히 졸업해 기술이라도 배우라’고 하셨어요. 그 뒤로 ‘대학 갈 것도 아닌데 아깝다’며 모든 지원을 끊으셨어요.”
“저런, 공부 재미를 알아가는데 갑자기 지원을 받지 못하니 무척 서운했겠네.” “네, 부모님은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드는 제가 실속 없다고 하셨어요.” “그런 평가를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어?” “싫어도 참고 해내는 능력이 부족하니 의지력이 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동안 놀기만 했는데, 문득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유튜브를 보다 멋진 건축물에 관심이 생겨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스페인 유학을 가서 건축 공부를 하고 싶어졌거든요.”
“그렇구나. 꿈이 생긴 거네?” “네, 꿈이 생기니 독학으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게 조금도 힘들지 않고 재미있어요. 예전에는 독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건축이나 스페인 관련 책을 많이 읽어요.” “스페인어가 재미있어 수업 시간에도 꺼내놓게 되는 거니?” “그렇다기보다는 들어봐야 하나도 모르는 수업 시간마다 제가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져요. 저도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구나. 그런 마음이 들겠네. 어때? 스페인어 실력이 느는 만큼 불안한 마음도 줄고 있니?” “아니요. 주변에서 좋아하는 과목만 파고드는 저를 인정하지 않으니 또다시 제가 못나게 느껴져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요?”
“그럼, 괜찮고말고. 꿈이 있고 이루려고 행동하는데 뭐가 문제야?” “결국 우리나라에서 성공하려면 좋은 대학을 가야 하잖아요. 대학을 가려면 내신 교과목들을 고루 잘해야 하고요.” “그건 공부를 대입의 수단으로만 볼 때의 생각이지. 공부의 힘은 생각보다 막강해. 네 인생에 걸쳐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만족하는 삶을 살도록 큰 힘이 되어줄 거야. 지금은 평생을 지속할 수 있는 공부의 기본기와 근육을 기르는 과정에 불과하니 속단은 금물이지. 걱정하지 말고 좋아하는 분야의 공부에 마음껏 집중해. 하기 싫은 공부를 꾸역꾸역 해내다가 정작 대학에 가고 나면 의욕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많잖아. 본격적인 공부는 대입 이후일 텐데 말이야. 넌 헛공부 하는 일 없이 누구보다 제대로 살아가겠어.” 아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점차 의욕적으로 구체화되는 자신의 진로 계획을 들려주었다.
균형 잡힌 식습관을 길러주려는 과정에서 밥 먹기를 싫어하게 된 아이 걱정에, “일단 좋아하는 음식을 실컷 편식하게 내버려둬. 그러다 보면 뱃구레가 늘어날 뿐 아니라 음식 먹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게 될 거야”라고 조언해준 육아 선배의 조언이 떠오른다. 학교교육이 곧 입시교육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아이들의 공부 의욕을 위축시킨다. 아이가 평생 공부를 통해 살아가는 힘을 지속시키기 바란다면 저 나름의 공부 전략에도 힘찬 응원을 아끼지 말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