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구 대법관 후보자가 지난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0일 권순일 대법관 후임으로 임명 제청된 이흥구 부산고법 부장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1호 판사’란 꼬리표를 달고 평생 법관 생활을 했다. 여기에 진보성향 학술모임으로 꼽히는 우리법연구회 활동 전력까지 더해 야당으로부터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는 공격을 받았다. 이 대법관 후보자는 지난 2일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목숨을 걸고 재판한다. 다른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판사의 삶이 시작된다”는 고 한기택 대전고법 부장판사(우리법연구회 창립 회원) 말을 인용하며 “공정한 재판을 하겠다”고 정면 돌파했다. 그는 “법원의 신뢰는 ‘재판 독립’이란 가치를 지키는 공정한 재판을 통해 회복될 수 있다. 대법관이 되면 법과 양심에 따른 정의로운 재판에 마음을 쏟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정의로운 재판을 통한 법원의 신뢰 회복’을 다짐한 이 후보자이지만, 정작 양승태 대법원 시절 사법행정권을 남용했다는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 질문에 대한 답변은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법원 안에서는 “아쉽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후보자는 사법행정권 행사의 정점에 있는 법원행정처 폐지안에 동의하며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를 수습해 사법행정권 자체를 다시 정리·정돈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는 밝혔지만, 그 사태의 원인이 된 사법농단 사건 자체를 두고는 발언을 극도로 아꼈다.
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받는 임성근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1심 판결문과 관련, 다음은 인사청문회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용민 의원과 이 후보자가 나눈 질문과 답변 일부다.
김 의원: “(임 부장판사) 1심 판결문은 ‘피고인의 재판 관여 행위는 법관 독립을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라고 했다. 위헌적 행동을 한 법관의 경우 탄핵 요건을 갖췄다고 생각합니까?”
이 후보자: 제가 그 내용은…판단할 자료가 없는 상태입니다.
김 의원: 만약 대법원에서 위헌적 행동에 대한 판단이 확정되면 탄핵 사유에 해당하나요?
이 후보자: 탄핵 사유에 대해서는 적절히 고민해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어서 나온 “만약 (재판 개입 등)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직을 걸고 저항하겠느냐”는 김 의원 질문에는 이 후보자가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미래통합당 유상범 의원이 “후보자 답변이 심히 우려된다. 사법농단 재판이 진행 중이고 관련자들이 연거푸 무죄를 받았다. 관련 내용을 잘 모르겠다면서 어떻게 거부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자, 이 후보자는 “지적을 받아들이겠다”고 수긍한 뒤 “기존 사법농단 사태를 전제하지 않고 일반적인 상황에서 재판 개입이 있다면 단호한 태도를 취하겠다”고 고쳐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이 “사법농단으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청와대와 거래하고, 법원행정처에서 판사들에게 (재판 관련) 전화를 해왔던 사실이 전부 드러났다. 이미 드러난 실체가 있어 (단순) 의혹으로 볼 순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 후보자는 “현재 재판 중이기도 하고, 그런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긴 곤란하다”며 또다시 즉답을 피했다.
정의당 배진교 의원도 사법농단 관여자들에 대한 책임 문제를 물었지만 이 후보자의 답은 비슷했다.
배진교 의원: 사법불신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입니다. 신뢰 회복을 위해 사법농단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징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는데 어떤 의견인가요?
이 후보자: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한 법원의 조사, 검찰 수사가 진행돼 현재 재판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긴 어려운 점 이해 바랍니다.
배 의원: 검찰 수사 결과 66명 전·현직 법관의 비위를 통보했지만 대법원은 10명만 징계를 청구했습니다. 징계 내용과 처분은 어떻게 되는지도 일절 공개하지 않는데, 이런 대법원의 모습이 사법부 불신을 회복하는 것인가요?
이 후보자: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의 철저한 조사와 결과에 따른 책임은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현재 징계가 어떤 이유로 진행되지 못하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어 구체적 의견을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이 후보자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축소를 위해 마련한 사법행정자문회의 산하 ‘재판제도 분과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해 김명수 대법원의 사법개혁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인사청문회에서 사법농단 진상 규명과 책임자 징계 문제 등을 둘러싸고 나온 이 후보자의 답변은 사법부 개혁을 바라는 내부 구성원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는 지적이 법원 안에서 제기됐다.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사법농단 사태는) 일선 판사들도 들어서 아는 내용이 많은데도 (이 후보자가) 잘 모르겠다고 한 것은 의문”이라며 “인사청문회는 사전에 질문을 받아 준비하는 것으로 아는 데 크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인사청문회를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판사도 “대법관 인사청문회는 대법관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인 측면에서 이 후보자의 (답변 내용은) 아쉽다”고 밝혔다. 지난 3일 국회 대법관 인사청문특별위원회는 이 후보자의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채택했다.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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