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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마주한 순간의 아이 마음에 집중하자…

등록 2020-09-05 13:35수정 2020-09-05 13:38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토요판]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

⑮경준이의 게임기

“선생님, 경준이 게임기는 왜 벌써 주셨어요?”

교무실에 찾아온 민찬(가명)이가 따져 물었다. 우리반 영어 담당 교사가 수업 중 몰래 사용한 경준(가명)이의 게임기를 받아서 담임인 내게 인계한 상태였다. “그럴 리가? 경준이 게임기는 내 책상 서랍에 있어” 하자,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게임을 하는 것 같던데요. 우리반에 저랑 경준이 말고 게임기 가지고 오는 애는 없어요.” 민찬이도 며칠 전 수업 시간에 게임기를 쓰다가 걸려 학급 내규에 따라 방과 후 지도를 받고 다시 찾은 터라 불만을 품은 것이다. 확인을 시켜주려 책상 서랍을 여니 게임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 여기 놓았는데? 민찬아, 일단 교실에 가 있어. 내가 더 알아봐야겠다” 하고 아이를 돌려보내자 옆자리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알아볼 게 뭐 있어요? 딱 보니 경준이가 몰래 꺼내 갔네요.” “그럴 수 있죠. 일단은 경준이에게 물어봐야겠어요.” 교실에 찾아가니 사물함에 무언가를 넣은 뒤 문을 닫고 있는 경준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와 교무실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 동료도 관심을 두고 듣는 눈치였다. “경준아, 아까 영어 선생님께 네 게임기를 받아서 이 서랍에 넣어놨거든. 그런데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사라지고 없어. 혹시 게임기의 행방을 아니?” “제가 어떻게 알아요? 게임기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어디 다른 데 두신 거 아니세요?” “수업 직전이라 급해서 손이 제일 잘 닿는 맨 위 칸에 넣어두었어. 물론 다른 칸도 다 찾아봤고.” “저는 영어 선생님께 드린 뒤로 못 봤는데요. 당연히 방과 후에 받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이의 표정과 말투는 사뭇 당당했다. “그렇다면 내가 네 게임기를 잃어버린 거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새로 구입해줘야겠다.” “에이, 그럴 리가요. 어딘가 있을 거예요. 그거 산 지도 오래됐고 유행도 다 지났어요. 저는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너는 괜찮다 해도 부모님이 애써 사주신 거니 책임을 다해야지.” “다시 한번 찾아보세요. 그래도 없으면 제가 부모님께 잘 말씀드릴게요.” “그래, 일단 더 찾아볼 테니까 4교시 수업 들어갔다가 점심 식사 후에 다시 의논하자.” 아이를 교실로 돌려보내자 옆에 있던 동료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왜 아이 말에 속아주세요? 그러다 애 버릇 나빠지겠어요.” “아이가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될까 봐 걱정되세요?” “네, 정황을 보니 몰래 가져간 게 확실한데 이렇게 쉽게 속아주시면 앞으로도 선생님을 무시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거짓말을 할 것 같아요.” “선생님이 보시기엔 아이 표정에 거짓이 있어 보이던가요?” “아니요. 그러니 더 괘씸하죠.” “저는 속아준 게 아니라 아이의 표정과 말에 그대로 반응한 것뿐이에요.”

4교시 수업을 마치자마자 게임기를 손에 든 경준이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다시 찾아왔다.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사실은 제가 가져갔어요. 사정해서 일찍 받고 싶어 뵈러 왔다가 자리에 안 계시길래 유혹을 못 이기고 그만….” “그랬구나. 당황하는 나를 보면서 네 마음은 어땠어?” “엄청 당황스러웠어요. 점심시간까지만 가지고 놀다가 다시 몰래 가져다 놓을 생각이었거든요. 급한 김에 잡아뗐지만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밥이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아요.” “용기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해줘서 기쁘다. 식사부터 하고 다시 이야기 나누어 보자.” 아이를 보내자 줄곧 지켜본 동료가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와, 선생님 고수네요! 결국 이렇게 되리라는 걸 다 알고 전략을 짜신 거였군요?” “아니요, 제가 무슨 점쟁이인가요?” “그렇다면 어찌 그토록 느긋하게 믿어줄 수 있어요?” “저는 마주한 순간의 아이 마음에 집중한 것뿐이에요. 마음은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잖아요. 아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따라가다 보면 스스로 제대로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오리라 믿어요.”

많은 양육자가 지식과 정보로 무장하고 정해진 목표에 맞춰 아이를 길러내고자 무던히 애쓰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을 때 가장 크게 성장한다는 사실만큼은 늘 기억하기 바란다.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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