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이 지난해 여름에 그린 부산 수영동 어느 작은 독립서점 실내. 올 크리스마스에 다시 찾았다. 그림 박조건형
글을 쓰며 살고 있긴 하지만, 나는 치열하게 읽거나 즐기면서 읽는 다독가는 아니었다. 누군가 책에 모든 인생의 해답이 들어 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찾고 있던 생의 해답도 책 속에 있었을까, 솔직히 확언하기는 힘들다. 모호한 삶에 위안이나 뜨거움을 얻기는 했겠지만, 구체적이고 선명한 포용 없이 흐릿한 손짓만으로 충분한 답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때 나는 오히려 유아적 박탈감에 사로잡혀 책 앞에 삐딱했던 것 같다. 성소수자니 트랜스젠더니 예전에는 아예 없는 존재 취급을 받았으니, 문학이나 책의 위대함마저 우리를 비켜 간 걸까, 나이를 먹은 지금도 나는 가끔 무기력해지고 만다.
가난한 가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책으로부터 유리된 건 아니었다. 없는 살림인데도 내 생모인 복희씨는 일찍부터 집에 책을 사서 모았다. 당신 자신은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지만 자식에게 못 가르친 후회는 없어야 한다고 믿었던지, 복희씨는 수십 권의 전집류를 구입하는 데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때에는 ‘책 장수’들이 집집마다 전집류 카달로그를 들고 돌아다니며 책을 팔았는데, 복희씨는 그들의 단골 고객이었다. 방 하나에 책들을 가득 쌓아 놓고 복희씨는 우리에게 책 읽기를 권유했지만, 나도 내 오라비도 책을 좋아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꽤 많은 작가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릴 때부터 집 안 곳곳에 책이 쌓여 있어 그 책들을 사탕 까먹듯 하나씩 읽어가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나는 그때 내가 글을 쓰며 살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작가의 꿈 같은 건 꿀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복희씨가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우리 삼남매를 집에 버려두고 사라졌을 때, 작은 방 가득 쌓였던 책들은 책이 아니라 네모나게 쌓인 온기 없는 목소리였다. 내다 버려야 할 잔혹한 모성의 짐꾸러미에 불과했다. 내 앞에 주어진 절망과 싸우다 혼곤한 몸을 이끌고 이따금 책더미 앞에 섰지만, 나는 책은 읽지 못하고 책의 표지만 쓰다듬다 돌아서곤 했다. 책을 그리워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책 앞에 사랑이란 말을 떠올릴 줄도 몰랐다.
나의 첫 책도 내가 글이나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냈다기보다 단순한 기록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조금은 다른 생의 기록이니 눈에 띄었겠지만, 결국엔 모든 생의 다름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정표나 지시등 같은 게 있었는데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을 뿐, 결국 길 없는 곳에 버려져 울고불고하다가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고 그게 길이 되어버린 기록일 것이다.
그렇게 첫 책을 낸 것이 2001년이었으니 그 후로 벌써 이십년째 글을 쓰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책을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선뜻 그렇다고 말하지 못한다. 책은 알겠는데, 사랑은 다른 문제다. 사랑을 사람에 대한 사랑, 물건에 대한 사랑, 성애적 사랑, 그렇지 않은 사랑, 이렇게 나누기 시작하면 대답은 더욱 어려워진다.
하지만 한가지, 나는 책에 둘러싸여 살고 있고 가난한 삶을 자처하며 책을 쓰며 살고 있지만(‘소설가’라는 직군은 언제나 연수입 최하위권을 다투는 직업이다), 지금은 이런 삶이 크게 나쁘지 않다. 익숙해졌거나 욕망의 덧없음을 깨달았거나, 어쨌든 내 삶은 이제야 조금 정돈되고 가지런해진 느낌이다.
나의 신랑을 포함해서 주변에 책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그들과 뒤엉켜 사는 일도 참으로 고맙고 또 행복하다. 그들은 가만히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들이고, 오래 바라보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폭력적으로 누군가의 삶을 재단하지 않고, 책의 낱장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듯 그 사람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책을 사랑할 줄 모르고 그리워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정말 사랑한다. 그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크리스마스니 명절이니 원래 그런 날에 우리 부부는 더욱더 집에만 가만히 머무는 편인데, 자동차를 몰아 책방 앞 골목에 대고 들어갔다 나오는 최소한의 접촉 동선을 활용해 다녀왔다. 김비 제공
며칠 전 크리스마스에는 신랑과 둘이 부산 수영동의 한 책방에 다녀왔다. 크리스마스니 명절이니 원래 그런 날에 우리 부부는 더욱더 집에만 가만히 머무는 편인데, 자동차를 몰아 책방 앞 골목에 대고 들어갔다 나오는 최소한의 접촉 동선을 활용해 다녀왔다. 바로 전날인 크리스마스이브에 책방 대표님이 올린 글 때문이었다. 벌써 한달째 책방에 손님이 한명도 없다는 글은, 어떤 비명 같았다. 나는 신랑에게 크리스마스 데이트로 책방을 다녀오자고 제안했고, 아내의 말을 대부분 믿고 따라주는 그도 알겠다고 했다. 우리가 책방에 들어선 것은 오후 3시였는데, 대표님은 우리가 첫 손님이라고 했다.
부스스한 얼굴로 웃으며 우리를 맞이한 대표님은 어제 괜히 그런 글을 올렸던 것 같다고 멋쩍어했다. 힘든 건 다 같이 마찬가지인데 괜히 우리만 힘든 티를 낸 것 같아 다른 책방 대표님들께 미안하다고.
우리 두 사람은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할 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힘든 상황일수록 더욱더 주변에 힘든 현실을 알려야 하고, 도움 받기를 꺼려서는 안 된다고 손을 저었다. 도움을 받는 내가 된다는 건 언젠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내가 되는 일이니 우리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고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살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는데, 나는 더 이상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도움도 아니었다. 정가대로 책을 몇권 사는 일이고 따로 후원금을 내는 일도 아니었으니 도움이라고 하기엔 오히려 더 민망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대표님은 거듭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올린 글을 보고 제주도에 거주하는 작가 한분은 내년에 구입할 책들을 계약하자고 연락이 왔고, 문학모임 곳간의 김대성 평론가는 내년에 쓸 도서 구입비를 한꺼번에 미리 입금해왔다고 했다. 다음달 월세는 그것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며, 대표님은 머쓱하게 웃었다.
책을 고르고, 우리는 손님이 없어 더욱 썰렁한 책방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이 없어 썰렁하긴 했지만 실내가 추운 건 아니었는데, 대표님은 계속 춥지 않냐고 되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전혀 춥지 않다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충분히 따뜻하다고.
대표님은 신랑에게 새로 얻은 직장 생활은 어떠냐고 안부를 물었다. 힘겨운 사람이 또 다른 힘겨운 사람의 사정을 먼저 헤아리고 묻는 일, 그것만큼 귀한 마음이 또 있을까? 신랑은 괜찮다고, 전에 다니던 직장보다는 훨씬 덜 부담스럽다고, 할 만하다고 말했다. 다시 또 신랑이 대표님의 안부를 물었고, 그는 한동안 일주일에 두세권 정도 파는 것이 전부였는데, 코로나가 격상되고 그마저도 뚝 끊겼다고 했다. 어느 나라에서는 봉쇄조치가 발표되면 자가격리에 들어가기 전날에는 격리 기간 동안 읽을 책을 사기 위해 책방마다 손님이 가득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우리에겐 판타지인 모양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다른 책방 대표님들도 ‘손님이 없어요, 책 좀 사러 와주세요’라고 차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쓸 수 없어 그렇지, ‘한가하다’, ‘여유롭다’는 표현의 그 너머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는 모양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아이 이야기에 대표님은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한동안 중학생인 아들과 자꾸 부딪쳐 힘겨워하셨는데, 최근에는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너어무’ 좋다고 했다. 휴대폰 사진 속에 대표님 아들은 운동기구를 들고 열심히 운동 중이었는데, 듬직해진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이 카메라 이쪽에 느껴져 나까지 흐뭇했다.
“그냥 우리는 여기 있어요. 여기 있다고요.” 김혜진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 한 대목을 적어둔 책방 한쪽. 김비 제공
마스크를 쓴 채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고 있는데, 딸랑 문이 열렸다.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여성 한분과 따님인 듯한 젊은 여성 한분이 같이 들어왔다.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책을 둘러보던 젊은 여성분이 휴대폰을 내밀며 혹시 이 책이 있느냐고 물었고, 대표님은 “죄송한데, 그 책은 입고가 되어 있지 않네요”라고 대답했다. 여성분은 다시 또 한동안 서가와 판매대의 책들을 둘러보다가 또 다른 책의 제목을 말했는데, 이번에도 대표님은 그 책은 없다고 대답했다. 웃으며 다시 또 알겠다고 대답한 여성은 어머님과 이것저것 책을 둘러보더니 다시 한번 또 다른 책의 이름을 댔고, 이번에도 대표님은 죄송하다며 그 책도 없다고 대답했다. 찾는 사람도 찾아줄 수 없는 사람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서로 민망할 수도 있을 텐데, 젊은 여성분은 환하게 웃으며 알겠다고 다시 오겠다고 했다.
“찾으시는 책이 없더라도 자주 와주셔요.” 듣고 있던 나는 문을 나서는 두분에게 이야기했고, 끝까지 환하게 웃으며 두분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책방을 나섰다.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입고된 책방은 없다. 아무리 큰 책방도, 아무리 큰 서점도 세상의 책을 모두 쌓아 두고서 독자를 기다릴 수는 없다. 책방의 존재는 책의 가짓수나 서가의 규모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책방 그 자체이기에 거기에 있다. 카페나 커피숍처럼 커피보다 사람을 만나고 여유를 찾기 위해 갔다가 커피의 맛이나 분위기의 그윽함까지 덤으로 얻고 오는 곳. 특정한 어떤 책을 사기 위해 가기도 하지만, 책방에 갔고, 그래서 좋은 기억을 품에 안고 돌아오듯 책을 한권 사가지고 돌아오는 곳이 바로 마을 속 책방이란 존재가 아닐지.
책방의 서가 너머 저녁의 빛은 조금씩 짙어졌고, 다시 또 문이 딸랑 열렸다. 또 다른 책방의 친구 한분이 “우와, 여기 너무 따뜻하다!” 탄성을 지르며 들어섰다. 휴일에도 남은 일을 하느라 출근했던 그 역시 어제 대표님의 글을 보고 걱정이 되어 찾았다고 했다. 털장갑을 벗으며 품에 안은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와르르 쏟아냈는데, 엉뚱하게도 서로 다른 색깔의 막대과자 세개.
왜 하필 막대과자였느냐고 묻지 않고, 우리는 그가 가지고 온 과자를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십일월 십일일에 먹었던 기억은 까마득하지만, 십이월 이십오일에 먹은 이 막대과자의 맛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우린 또각또각 기다란 막대과자를 부러뜨려 먹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요즘의 걱정들을 나누었다. 어떤 말을 나누었든 ‘힘내요’, ‘우리 잘 버텨봐요’, 그 뻔한 말들의 다른 표현이었을 텐데, 우린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고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여기 참 따뜻하다.” 그러고도 우리는 몇번 더 그렇게 웅얼거렸는데, 대표님은 더 이상 춥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대표님은 책이 생필품이 아니고 시급한 품목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찾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날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픈 때와는 다른 내 안에 어떤 허기가 채워진 기분이었다. 책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인 나에게, 고립이나 고독을 일상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나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너무도 오랜만의 포만감이, 그날 거기 마을 책방에 있었다.
▶ 김비.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