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공연 중에는 비밀이었지만, 관객 속에 항상 내가 앉아 있었다. 푸른 바다를 닮은 무대를 바라보며 나 역시 관객들과 함께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나도 무대 위로 올라간다. 김비 제공
뇌병변 장애인이자 퀴어 페미니스트인 일라이 클레어는 책 <망명과 자긍심>에서 ‘장애를 가진 몸’에 관해 말하며 자신의 삶을 무대 위로 끌어온다. 아니, 무대를 자신의 발밑으로 가져온다. 무대 위에 선 몸으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몸 아래 무대를 내려본다.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으로, 무대를 본다. ‘자긍심’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가 말한 ‘무대’라는 용어가 꼭 비유적인 표현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일명 ‘프리크 쇼’라고 불리는 ‘다른 외모’, ‘다른 신체’를 눈요깃거리로 삼은 비즈니스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어차피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폭력적 환경에 노출되어 사회 바깥으로 떠밀렸던 이들이, 실제 무대 위의 삶을 자처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역사.
그러한 비즈니스를 운영한 ‘정상 인간’들이 착취하는 사람이든 그들을 보살피려는 선한 인간이든 차이는 없었다. 무대 위에 선 당사자가 바라보는 풍경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들과는 ‘다르다고 믿는’ 누군가를 보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 환호하든 비웃든 다르지 않은 입 모양들.
단지 운이 좋아 서로의 자리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러니 무대 위 당사자들 역시 관객석에 앉은 그들을 향해 비웃어줄 수 있어야 하는데, 좀처럼 쉽지 않다. 와르르 웃어버리고 마는 그들을 가까스로 흉내내더라도, 그 웃음 너머까지 가벼울 수는 없는 일.
우리는 돈을 냈고, 똑같이 ‘윈윈’하는 시간을 보냈는데,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관객석의 그들은 항변하겠지만, 그들의 이해는 ‘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선은 ‘웃는 얼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무대 위에 설 필요 없는 자신의 신체를 ‘복’이라며 무대 위를 타자화하는 짓 또한 더더욱 곤란하다.
‘그럼 뭘 어쩌란 말이냐?’라는 질문에 나 역시 아직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했지만, 머뭇거리는 내 입이 그 질문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증거라고 결론지어서는 절대, 절대, 절대 안 된다.
‘그 사람들’, ‘걔네들’이라는 지시적 의미로서의 타자화는 얼마든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라.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입꼬리는 어디에 있는지. 당신의 그 얼굴 속에, 당신의 그 유전자 속에, 장애도 있고, 퀴어도 있을 테니 말이다.
연극 <물고기로 죽기> 속 한 장면. 정은영 연출은 모든 예술적 경계를 뛰어넘는 감각으로 내 텍스트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고, 기획자 고주영은 적재적소에 필요한 예술 인력들을 가려 섭외해 최대치를 뽑아냈다. 황순미·양대은 두 배우는 놀랍도록 정교하게 무대 위에 옮겨주었고, 음악가 키라라는 글자 위에 다른 차원의 에너지를 선물했다. 김비 제공
‘트랜스젠더’라는 낯선 이름을 달고 50여년을 이 사회 속에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조용히 살라’였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거기에 없는 것처럼 살아가라’였다.
실제로 그런 삶을 꿈꾸기도 했다. 다행히 나의 ‘퀴어 신체’는 여자치고 조금 사이즈가 컸을 뿐 말투나 목소리, 외모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아 ‘조용히 살려고’ 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호적 정정을 하고 결혼까지 하면서, 전혀 다른 지역에 내려와 살면서 나는 정말 한동안 그렇게 살았다.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운동’을 했었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남자가 되려고 농구를 굉장히 열심히 했으니, 내 대답은 거짓도 아니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는 사람들 속에, 그들이 말하는 ‘여성’ 속에 ‘조용히’ 살 수 있었다. ‘조용히 살라’는 이 사회의 명령이 ‘살라’에 있지 않고 ‘조용히’에 있었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를 드러낸 이유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엉뚱하게도 ‘사람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는 ‘겁에 질린 비인간(非人間)’ 너머에서 침묵하고 있지만, 조금씩 자기 자신과, 내 아이들의 미래를 다른 방식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들처럼 나 역시 내가 빚지고 살아온 이 사회에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웃으며 서로 어우러져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선의니 책임감이니 자긍심이니 뭐 그런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다. 사람 사이에 기꺼이 섞여 살고자 하는 목숨이라면 누구든 마땅히 가져야 하는 공존의 기본값. 나는 공존하는 인간으로서, 그저 내가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성별의 역할이란 오직 생식(生殖)일 텐데, 왜 우리는 온 생애를 통틀어 두 다리 사이의 그것에만 붙들려 살고 있는 걸까? ‘그러면 안 되는 것’이라고 들었던 무수히 많은 사회적 요구들이 정말 ‘그래선 안 되는 일’이 맞을까? 온전한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생식기로서의 인간’이 되면서, 혹시 나 자신의 존재는 너무 많이 깎여나가지 않았을까?
그래, 아름다운 순간도 있었겠지. 모두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결국 이루어낸 것들. 영문도 모르는 사회적 명령에 따라 스스로를 도취시키고 타인의 어깨를 움켜쥐면서, 어느 독재국가의 매스게임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그 몸짓이 만든 풍경이 장관이기도 하겠지. 그러나 더 이상 일체된 장관을 만들 수 없는 우리의 몸은, 인간의 삶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을까? ‘생산’하지 못하는 몸을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전락시키면서,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를 자학하고 괴롭히며 살아온 걸까? 나는 모른다고, 내 일 아니라고 정말 등 돌린 채 모른 척할 수 있는 일일까? 지독히도 환각적인 사랑, 판타지화된 결혼, 이분법적 성별에 근거한 사회로 인해 너무도 당연시되어버린 폭력과 조롱들.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벽에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상징하는 문구가 붙어 있다. 김비 제공
혹시, 당신 역시 나와는 다른 무대 위에서 이 사회의 조롱과 비난을 견뎌내고 있는 중 아닌가?
16세기 이전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들은 막 성인이 되었을 때 아이에게 자신의 사회적 성별을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고 전해진다.(사브리나 페트라 라멧의 <여자, 남자, 그리고 제3의 성> 참고) 여러 가지 상징적 물건들 중에 아이가 하나를 선택하면 그것으로 부족 내 아이의 젠더를 확인하고 또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나는 이 기록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를 본다. 근원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그들을 본다. 우리가 미개하다고 손가락질하는 그들에게서, 문명화된 이 사회에 점점 찾아보기 힘든 진정한 존중의 의미를 발견한다.
생명은 태어나고, 성별은 기록되지만, 하나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그는 성별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스스로 가장 충만한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존중받아야 하는 자신처럼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는 성별 이전에 갖추어야 하는 것이며, 사회적 성별이란 방향을 정하는 일일 뿐 우리는 생식기의 모양이나 종류와는 상관없는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대하고 어우러지는 법을 배워가야 할 일이다.
도대체 누가 아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걸까? 아이에게 한가지 옷을 입혀, 너무 빨리 한가지 옷만을 입혀 무대 위에 세우는 태도는 정말 아이를 위한 일일까? 오히려 그때 그 원주민들의 기다림, 선택의 자유, 축하가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문명적인 일이 아닐까?
물론 모포 위 네개의 윷가락처럼 운이 좋게도 네개 모두 나란히 뒤집히거나 나란히 엎어졌다면 두 손 들어 축하할 일. 하지만 그 사실이 그렇지 못했던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조롱할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사람들 속에 섞여 살기로 해놓고, 사람이 아닌 성별 속에만 섞여 사는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의 무대일까? 무대 바깥에 또 다른 관객은 우리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을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최근에 실제 연극 무대에 설 기회가 있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였고, 고마운 기회였다. 그들은 트랜스젠더인 나의 ‘노년’을 같이 기록해보자고 청해왔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모든 경계를 뛰어넘어 역동하는 건강한 페미니스트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빚진 삶을 살아왔다고 나는 고백한 적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희곡 작업은 처음이지만, 내 손으로 무대를 내 발아래로 가져왔다. 조롱받거나 호기심거리로 전락한 무대 위에 선 내가 아니라, 흔들리고 위태롭지만 끝까지 온전한 생을 살아낸 한 인간의 삶을 들려주는 마음으로 텍스트를 써내려갔다. 아직 쉰하나에 불과하지만, 칠십 팔십의 생을 자유롭게 살다가 떠나는 삶을 ‘물고기’에 비유해 적었다. 관객이 들어야 하는 작업이니 조금 재미있게 적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얹힌 게 많은 삶이라 그런지 위트 있고 재미있게 그릴 수는 없었다. 여기 이 사회라는 무대 위에 조롱당했던 기억들은 아주 쉽게 떠올라 가벼워지고 싶은 내 목덜미를 끌어잡았다.
너무 무거워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정은영 연출은 모든 예술적 경계를 뛰어넘는 감각으로 내 텍스트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고, 기획자 고주영은 적재적소에 필요한 예술 인력들을 가려 섭외하고 끌어모아 내 부족한 텍스트에서 최대치를 뽑아냈다. 쉽지 않은 텍스트와 연기를, 황순미·양대은 두 배우는 놀랍도록 정교하게 무대 위에 옮겨주었고, 음악가 키라라는 글자 위에 다른 차원의 에너지를 선물했다.
연극 무대 하나를 올리는 데 많은 인력이 필요한 건 알았지만 그토록 많은 예술가들이 무대 너머에서 하나의 무대를 떠받치고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당연히 나는 그들의 성별이나 정체성, 혹은 성적 취향 따위 물을 필요가 없었고 각 파트에서 진심을 다해 제 몫을 훌륭히 해내는 동료들이 있을 뿐이었다. 안무, 조명, 음향, 영상, 기술, 무대, 수어 통역까지, 물고기 한마리의 삶을 적었던 나는 나와 같이 헤엄치는 엄청난 수의 물고기들과 내내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하필 연극을 준비하는 와중에 연거푸 비보를 듣고 주저앉고 말았을 때, 그들이 모두 내 곁에 있었다. 내 울음소리를 같이 들어주었다. 내 팔을 붙들고 내 등을 쓰다듬으며, 나와 같이 울어주었다.
연극 공연 중에는 비밀이었지만, 관객 속에 항상 내가 앉아 있었다. 푸른 바다를 닮은 무대를 바라보며 나 역시 관객들과 함께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나도 무대 위로 올라간다. 아직 칠십 팔십의 삶을 산 나는 아니었지만, 당신들 덕분에 여기까지 잘 살아온, 멋지게 늙어온 나를 보여주러 올라간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나는 사람입니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갑니다. 두 다리로 걷고, 두 팔이 있고, 말하고, 웃고, 웁니다.’ 그 즉시 나는, 그게 사람의 조건일 리 없다고 정정한다. 다시 말한다. 두 다리나 두 팔이 없어도 사람이고, 말하거나 웃고 울지 않아도 사람이라고. 사람은 몸 하나이거나, 생식기 하나이거나, 이름 하나일 리가 없다고. 사람은 좁은 물속에서 태어나지만, 사람이 사는 세상은 물속이 아니라고. 아무도 사람을 물고기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사람’인 나를 선언한다. 언제나 간단히 지워지고, 조롱당하고, 혐오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나를, 거듭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당신들은 굳이 그럴 필요 없는 그 선언을, 나는 무대 위에서 거듭하고 또 해야 한다. 삶을 위해서다.
지난 4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한 <물고기로 죽기>(김비 작, 정은영 구성·연출, 고주영 기획·제작) 포스터. 박조건형 드로잉, 김비 캘리그래피.
▶ 김비.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