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준|사건팀장
수년 전 어느 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그의 가족과 지인이 소유한 땅의 투기 의혹을 취재한 적이 있다. 고위공직자 땅 투기 의혹 취재를 여러차례 했지만 그때 기억이 가장 많이 난다. 후보자 가족들이 소유한 땅이 내가 태어나서 30여년 살았던 수도권 한 도시의 구석, 얕은 산 중턱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도시 외곽에 덩그러니 있던 땅이 그렇게 값어치 있는 곳인지는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열람하고, 공인중개사들을 취재하면서 알게 됐다. 후보자가 국회의원이던 2000년대 초반, 그의 가족은 이 땅을 샀다. 해당 토지에 걸린 규제가 막 풀리고 개발 기대감이 높던 시기다. 인접 필지 등기부등본을 떼보면 국회의원, 대기업 일가 등 유력인사 10여명의 이름이 쏟아져 나왔다. 부동산 컨설팅 업체가 관여해 일괄 매매계약을 해서 토지를 사들인 날도 같았다. ‘쪼개기 매입’ 흔적도 있었다. 이들이 매입하고 십몇년 뒤 땅의 공시지가가 10배 올랐다고 기사를 쓰며 “투기와 무관하다. (가족이) 집을 지으려 했다”는 후보자 쪽의 해명을 붙였다. 여론은 들끓었지만 해당 토지 매입이 ‘투기’인지, ‘투자’인지는 이후에 명확히 가려지지 않았다. 고위공직자나 유력인사들의 부동산 투기가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책상 위에 쌓인 등기부등본 출력물 더미를 바라보며 ‘그들만의 리그’의 존재감을 새삼스레 실감했던 것 같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엘에이치) 직원들의 3기 신도시 투기 의혹이 불거지고, 오랜만에 등기부등본을 들춰본다. 오늘도 많은 기자들이 등기부등본 위에 건조하게 나열된 숫자와 주소의 미로를 헤매고 있다.
기시감이 든다. 엘에이치 직원들이 쏘아 올린 부동산 투기 의혹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국회의원, 청와대 직원, 일반인 등이 소유한 전국 곳곳의 땅을 들춰낸다. 그동안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부동산 리그’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엘에이치 직원들이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땅을 사들였는지는 수사로 밝혀져야겠지만, 개발 기대감→기획부동산, 투기꾼들, 유력인사 등의 쏠림→지분·지번 쪼개기→가짜농부 양산 등의 구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큰 틀에서 바뀌지 않은 것 같다. “투기가 아니고 투자”라는 해명도 ‘복사→붙여넣기’다.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청년진보당 당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들의 3기 새도시 사전 투기 의혹에 대해 규탄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직업인으로서의 나’는 부동산 투기 의혹의 사실관계와 투기꾼들을 양산하는 제도적 허점을 찾아내는 데 힘을 쏟지만, 퇴근 뒤 ‘생활인으로서의 나’는 박탈감인지, 질투인지 모를 모호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세상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서글픈 사실을 다시 마주하기 때문이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이 땅을 샀을까’ ‘저들의 인맥은 어떻게 얽혀 있을까’ ‘정보를 알아도 돈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야’…. 불로소득이 야기하는 사회적 문제는 너무나 명백하지만 가장 큰 폐해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체보다 ‘각자도생’에 더욱 매달리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평등의 세대>, <세습 중산층 사회>, <20 VS 80의 사회> 등 지난 몇년 화제가 됐던 책들이 지적하듯 ‘그들만의 리그’는 더욱 공고해지고, 막차에 몰리듯 사람들은 자산 투자 등에 매달린다. 블라인드에 올라온 “꼬우면 이직해”라는 글은 ‘각자도생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다. 물론 애초 막차 탈 꿈도 못 꾸는 이들이 수두룩하지만.
‘부동산 적폐청산’ 이야기가 나오는데,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정부나 정치권 사람들조차 부동산 리그 상층에 위치한 사실이 드러나며 이들이 어디서부터 무엇을 청산하겠다는 건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청와대와 정부 조사단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73%인 여론조사 결과(18일 공개된 전국지표조사)는 많은 시민의 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만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며 팀원들과 등기부등본을 다시 들춘다. 어느 시인의 탄식이 이번만은 틀리길 기대하며. “분노는 안개처럼 흩어지고, 슬픔은 장마처럼 지나가고/아, 세상은 또 변하지 않을 것이다.”(백무산 <스물두 살 박지영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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