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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사법농단 유죄 판결문이 쏘아 올린 ‘직권남용’ 새 해석

등록 2021-03-28 16:59수정 2021-03-28 17:03

판사의 명백한 잘못에 대해 “대법원장 등 지적권한 있다”
‘직권의 월권적 남용’까지도 직권남용이라고 판시
법원 내에선 평가 엇갈려…대법원 어떤 판단 내릴까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전직 법관 중 처음으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직권남용)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법조계에서는 “직권남용 판단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직권남용죄는 국정농단·사법농단 연루자 등에게 광범위하게 적용된 혐의인데, 조항이 추상적이고 대법원의 해석도 명확하지 않아 하급심의 판단이 엇갈려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재판장 윤종섭)는 지난 23일 이민걸 전 실장·이규진 전 상임위원에 대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직권남용죄에 대한 새로운 판단들을 내놨다. 첫 번째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에 일선 판사에 대한 ‘지적권한’이 있다고 본 부분이다. 판결문을 보면, 지적권한이란 “판사가 장기미제 사건을 계속 처리하지 않거나 법 해석을 잘못해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는 때”에 이를 사법행정권자가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이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판사들에 대해 인사평가를 내리고 연임 여부도 결정할 수 있는데, 이렇듯 인사권을 쥔 대법원장과 행정처가 판사들의 명백한 잘못에 대해 “어떠한 지적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민걸 실장과 이규진 상임위원은 ‘지적권한’이 있는 대법원장 및 법원행정처장 등의 지시를 받아 재판개입같이 ‘지적권한’이 넘는 수준의 일들을 벌였고,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직권을 남용했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이규진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2018년 8월23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이규진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2018년 8월23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이민걸·이규진 재판부는 또 직권남용 법리에 대해서도 새 판단을 내놨다. 대법원이 확립한 직권남용에 대한 해석은 “공무원이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관해 형식적, 외형적으로는 직무집행으로 보이나 그 실질은 정당한 권한 이외의 행위를 하는 경우”다. 여기서 ‘일반적 직무권한’을 어디까지로 봐야 할지가 모호한 탓에, 직권남용 사건에 대한 하급심과 상급심의 판단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령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압박해 보수단체에 자금을 지원하도록 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사건에서 1심은 “전경련에 대한 자금지원 요청이 청와대 비서실장의 직무권한에 속하지 않는다”며 무죄로 판단했지만, 2심과 대법원은 “전경련에 자금을 지원하라고 요구한 행위는 대통령 비서실장의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이라며 유죄로 판단했다.

이민걸·이규진 재판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일반적인 직권 범위 내에서 직권을 남용한 ‘직권의 재량적 남용’뿐 아니라, 일반적 직권의 범위를 벗어났더라도 일반적 직권과 상당한 정도로 관련성이 인정되는 ‘직권의 월권적 남용’에 대해서도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고 본다”고 적시했다. 재판부는 “‘남용’의 사전적 의미는 ‘권리나 권한을 본래 목적이나 범위를 벗어나 함부로 행사함’인 바, 어떤 행위가 일반적 직권의 정당한 범위를 벗어나 이뤄진 경우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사전적 의미에 부합한다”며 직권남용의 적용 범위를 더 넓게 해석했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2018년 9월1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2018년 9월1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에 대한 판사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재판 지연 등의 문제가 있으면 징계나 인사이동 등으로 해결할 문제다. 사법행정권자에게 재판부에 대해 지적할 권한이 있다고 해버리면 어느 누가 재판에 대해 신뢰할 수 있겠느냐”며 “판사 절대다수가 판결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반면 또 다른 고위 법관은 “유·무죄 같이 실체적인 부분에 대해선 (사법행정권자가) 범접해선 안 되지만, 특정 재판부에 장기미제 사건이 너무 많다거나 현저하게 절차적 부당함이 있을 때는 지적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판결에 수긍하는 편”이라며 “직권남용에 대해 법원이 ‘직권이 없으면 남용도 없다’고 판단해왔는데, 한편에선 ‘권한도 없으면서 상하관계를 이용해 의무 없는 일을 시키는 게 더 나쁘다’는 주장도 있다. 이 사건이 직권남용에 대해 새로운 화두를 던진 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을 비롯해 법관들의 초유의 ‘재판 개입’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큰 만큼, 대법원의 판단에 주목하고 있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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