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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안 한다는 아이에게 ‘싫긴 뭐가 싫어!’라는 말 대신

등록 2021-04-17 12:07수정 2021-04-17 22:18

[토요판]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
27. 감정에도 이름이 필요해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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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아이가 우리를 싫어해요. 모둠을 바꿔주세요.”

중학교 1학년 아이들과의 중창 수업 중이었다. 노래를 익힌 뒤 모둠별로 연습할 시간을 주었다. 여러 모둠의 연습 상황을 지켜보다가 마지막 모둠의 자리로 갔을 때 다섯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한 아이를 흘겨보며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한 아이가 나서서 상황을 전했다. “선생님, 창우(가명)가 우리와 노래하지 않겠다고 거절해서 좋은 말로 설득하는데도 통 듣지 않아요.” “아, 그랬구나. 창우야, 친구들과 노래하지 않겠다고?” “네, 저는 얘네들과 노래하지 않을 거예요.”

교사의 개입에도 같은 반응을 보이니 아이들은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얘들아, 수업이 끝나가니 마음이 급하겠구나. 일단 너희 다섯명이 연습하고 있어. 창우와 더 이야기 나눠볼게.” 창우와 교실 한쪽으로 가서 다시 물었다.

“혹시, 모둠 구성에 불만이 있니?”

“아니요. 그냥 안 한다는 거예요.”

“그럼 노래 부르기를 싫어하니?”

“아니요.”

“음, 싫어하지 않는구나. 그럼, 혼자 부르는 걸 좋아하니?”

“아니요.”

“아, 그래. 그런데도 저 친구들과 노래하지 않겠다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텐데… 뭘까? 무척 궁금하네.”

창우는 답답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싫은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예요.”

“아, 아직 선율을 충분히 익히지 못했니?”

“아니요.”

“그럼, 다른 아이들과 음역이 안 맞나?”

“아니에요.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 그럼 예전에는 어땠어? 친구들과 함께 노래한 적이 있어?”

“네.”

“아, 그렇구나. 혹시 아이들이 낯선 걸까?”

“네, 아직 친해지지 않았어요.”

“그렇구나. 넌 친밀한 사람하고만 함께 노래할 수 있구나? 쑥스럽겠네.”

“네, 맞아요!” 아이는 시원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모둠과 친해질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걸까?”

“네, 맞아요.” 비로소 안심이 되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마음을 끝까지 정확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아까처럼 말하면 친구들은 네게 일방적으로 거절당했다고 느낄 수 있겠다. ‘난 아직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함께 노래하기 어려워. 익숙해지려면 좀 더 시간이 더 필요해’라고 말해주면 어땠을까?”

“아, 그게 좋겠네요.”

며칠 후 다음 수업이 돌아왔다. 아이들이 모둠별 발표를 앞두고 긴장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원하는 모둠이 우선 발표하기로 해요. 먼저 할 모둠?” 하고 질문하자 창우가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둠의 다른 아이들도 찬성했다. 창우는 마치 지휘를 하듯 어깨와 고개를 흔들며 모둠의 구심점이 되어 힘차게 노래했다. 아이들의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다른 모둠 아이들도 용기가 나는지 덩달아 서로 먼저 발표하겠다고 앞다퉈 손을 들었다.

마치 축제 같은 발표 수업을 마친 뒤 복도에서 창우에게 말을 걸었다.

“창우야, 너 정말 신나게 노래하더라.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니?”

“함께 해야 하니까요”

“와, 우리 창우는 마음만 정확하게 알면 누구보다 잘 해결하는 저력이 있네.”

아이는 으쓱하며 내가 내민 주먹에 작고 여린 주먹을 경쾌하게 부딪쳤다.

싱어송라이터 시와는 ‘감정에도 이름이’라는 곡에서 ‘가려도 드러나는 어두운 마음이란 이름 없이 사라지지는 않아… 감정에도 이름을 불러주면 오히려 사라지고 그게 바로 나를 마주하는 일’이라고 노래했다.

감정의 분화가 활발한 청소년기의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알아가도록 이끌기 위해 때로는 진위형, 선다형의 질문도 필요하다. 마음 문의 비밀번호를 찾듯 적확하게 감정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아이는 누구도 감히 탐할 수 없는 강한 내면의 기운을 힘차게 뿜어낸다. 버드나무 가지의 질긴 껍질을 뚫고 보드라운 새잎이 뾰족이 돋아나듯 한 사람의 봄, 사춘기는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김선희 |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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