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30년. 페르노리카 코리아 누리집 갈무리
같은 양주라도 면세점에서 샀느냐, 마트에서 샀느냐, 또는 고급 술집에서 주문해 마셨느냐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이런 양주가 재판에 등장하면 술값을 얼마로 계산하느냐, 또 몇명이 나눠 마셨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부절적한 향응 또는 뇌물로 다뤄지는 탓에 술값에 따라 유·무죄가 갈리고 형량이 다르게 선고되기 때문이다. 고급 양주의 경우 시가를 매기는 게 비교적 까다로워 법정에서는 검찰과 피고인 간의 치열한 논리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지난주 선고된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선거법 위반 재판이 그런 사례다.
“양주 가액은 통상적인 거래가격 또는 시장가격으로 산정해야 한다. 통상적인 시장가격보다 훨씬 높은 백화점 판매가를 기준으로 양주 가액을 산정한 원심판결에는 사실오인 또는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다.”
1심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던 김 의원의 ‘의원 생명’을 살린 건 2심에서 반 토막 난 ‘술값’이었다. 김 의원은 2019년 10월 지역구민 4명과의 술자리에서 고가의 양주 ‘발렌타인 30년산’을 제공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기소돼 1심에서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았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당선이 무효가 된다.
그러나 김 의원은 지난달 28일 2심에서 벌금 90만원을 선고받아 당선무효형을 피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양주가 일반적인 주류매장에서는 약 50만원에 판매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김 의원에게 1심보다 낮은 벌금형을 선고했다. 같은 술을 두고 1심과 2심에서의 가격 차가 55만원이나 났던 것은 검찰이 이 술의 가격을 최고가로 팔리는 백화점 기준으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1심 때부터 이 사건 발렌타인 30년산의 가격이 백화점 가격에 준해 105만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역구민과 식사 자리에 이 술을 가져간 김 의원이 해당 술을 어디에서 얼마에 샀는지 입증할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반면 김 의원 쪽은 항소심에서 ‘해당 술 가격은 약 50만원’이라며 온라인매장 등 시중에서 판매되는 ‘통상 시장가격’을 증거로 제출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달리 피고인의 손을 들어줬다. 한 하급심 판사는 “검찰에서 (가격이 더 높다고) 입증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 변호인의 반증이 받아들여진 것”이라며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재판부가 50만원으로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같은 술이라도 재판에서 인정된 가격이 세배나 차이 나는 경우가 있었다. 2006년 구청장 후보 공천을 대가로 1400여만원어치의 선물을 받은 혐의(배임수재)로 기소돼 이듬해 벌금 700만원을 확정판결 받은 박성범 당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의 재판에서는 고급 코냑 ‘루이 13세’의 가격이 쟁점이 됐다.
이 사건 판결문을 보면, 박 전 의원이 받은 이 술의 가액은 재판 내내 300만원으로 인정됐다. 박 전 의원 쪽이 수사기관에 양주 가격을 참고할 수 있는 자료 등을 내며 과도한 계산이라고 항변했지만, 재판부는 “형식과 내용상 믿기 어렵다”며 배척했다.
반면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뇌물 수수 혐의 재판에서 이 술은 시가 100만원으로 산정됐다. 안 전 수석이 2014년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의 단골 성형외과였던 김영재 원장 부부로부터 이 술을 뇌물로 받았는데, 면세점에서 구입했다는 점이 인정돼 면세점 가격이 적용된 것이다. 박성범 전 의원의 재판과 안 전 수석 재판 사이에 8년여 시차를 고려하면 실제 재판에서 적용된 이 술의 가격 차이는 3배 이상이 되는 셈이다.
검찰 관계자는 “(시가 산정은) 사안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실제 지급된 가격으로 (기소)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며 “양주처럼 어디서 샀느냐에 따라 시가 차이가 큰 물건이 많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검사 술접대, 이번엔 “참석자 5명이냐 7명이냐” 공방
최근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이 폭로한 ‘술접대 의혹’으로 기소된 전·현직 검사들의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 재판에서도 술값은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바 있다. 이 사건에서는 정해진 술값을 두고 몇 명이 술을 마셨느냐가 더 논란이 됐다.
검찰 조사 결과 이날 술자리에서 지불된 술값은 총 536만원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검찰과 피고인 쪽의 이견이 없었다. 다만 536만원어치의 술(안주포함)을 몇 명이 나눠 마셨냐에 대한 주장은 엇갈리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남부지검은 해당 술자리에 김 전 회장과 변호사 ㄱ씨, 검사 3명 등 모두 5명이 마신 것으로 봤다. 그리고 술접대를 받은 검사 3명 중 2명은 중간에 술자리를 빠져나왔으므로 96만2천원의 향응을 받은 셈이라고 계산해 불기소하고, 마지막까지 술자리에 남아 있던 다른 ㄴ검사 1명만 113만5333원의 향응을 받았다고 계산해 기소했다. 1인당 접대 금액이 100만원을 초과하지 않으면 청탁금지법(김영란법)상 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게 검찰의 논리였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기소된 변호사 ㄱ씨 쪽은 지난 27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나중에 술자리에 인사하러 온 2명이 합석해 술을 마셨다는 점을 지목하며 ‘(먼저 간 검사 2명을 포함해) 참석자를 7명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기소된 ㄴ검사 쪽도 ㄱ씨 쪽의 주장에 동의했다. 7명으로 술값을 계산하면 ㄴ검사의 향응 수수액이 처벌 기준인 100만원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변론인 셈이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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