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험이 없다니 자궁경부암 검진에서 매번 거절당해서 지난해부터는 그냥 거짓말하고 검진을 받았다. 올해 검사에서 질 입구 쪽 염증이 있다는 진단이 나왔고, 추가로 한 질 내부 검사로 자궁에 혹이 있는 걸 발견했다. 사실대로 성 경험이 없었다 말했으면 못 찾았겠지?”
최근 SNS에서 널리 공유된 경험담이다. 이에 반응한 이들이 여성 질환 검진이나 진료 때 자신이 겪은 일들을 잇따라 공유했다. 이런 ‘의료괴담’은 새로운 게 아니다. 지난해 말 한국여성민우회가 펴낸 ‘2020 여성 의료 경험 사례집’에도 여성들이 산부인과에서 겪은 황당한 일들이 나와 있다.
어떠한 종류의 성 경험도 없는 지인이 40대가 되면서 자궁건강이 신경 쓰여 건강검진에서 질경검사를 받고자 했지만 성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의사가 검사를 거부했다.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여러 가지 질병의 위험이 높아지는데, 성 경험이 없는 여성들의 자궁은 질병 청정지역이라고 생각하라는 건가?
자궁경부암 검진을 하라고 연락이 온다. 그래서 검사하러 가면 성관계 여부를 묻는다. 경험이 없다고 하면 검사를 못 한다며 검사를 해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자궁경부암 검사는 해본 적이 없다. 왜 그런지 설명도 없고 안 된다는 경우가 많다.
- 한국여성민우회 ‘2020 여성 의료 경험 사례집’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최예훈 산부인과 전문의는 “의사들이 여성의 경험과 삶에 대해 무지한데서 비롯한 문제”라고 짚는다. 자궁경부암 발병 원인인 인유두종바이러스 감염이 성기의 직접 접촉이 원인 경우가 대부분인 건 맞다. 하지만 100%는 아니다. 최예훈 전문의는 “흔하지는 않지만 손가락이나 성 기구 등을 통해 질 안쪽으로 바이러스가 유입되는 경로가 있으면 검진 대상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의사들이 대부분 ‘성 경험=남성과의 삽입 섹스’라는 인식에서 딱 그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 다른 경로가 있다고 충분히 설명하면 병원을 찾은 여성들은 대부분 검사를 받겠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여성들은 의사 또는 간호사가 ‘성 경험 유무’를 별 설명 없이 다짜고짜 묻고, 경험이 없다고 답하면 처녀막 손상을 이유로 질 초음파 검사를 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 꼭 필요한 의료행위인데도 의사가 ‘처녀막이 손상되면 안 된다’며 진찰을 거절하는 사례까지 있다.
생리불순과 질염이 너무 심해서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러 갔는데, “성 경험이 없다면 처녀막이 찢어질 수 있으니 따로 내시경을 비롯한 추가 검진은 해 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장 효과적인 생리통 치료를 원했지만 병원에서 “처녀막 찢어진다”며 다른 치료를 권했다.
성관계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검사를 제대로 안 해준다. 생리통이 심해서 병원 가서 별걸 다했는데 시티(CT·컴퓨터단층촬영)에서 미세하게 혹이 있다고 나왔다. 정확하게 보이지 않아서 직접 검사하면 확실하게 파악하고 수술을 할지 말지 결정하면 됐다. 그런데 관계 경험이 없다고 직접 검사는 안 된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 한국여성민우회 ‘2020 여성 의료 경험 사례집’
‘처녀막이 손상되니까 질 초음파는 안 된다’는 의사들의 말은 합당하지 않다. 최예훈 전문의는 “처녀막 자체는 기능 자체가 없다시피 한 조직이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처럼 막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구멍이 뚫려 있는, 막처럼 보이는 조직이다. 게다가 이 조직의 모양은 사람마다 달라서 파열됐을 때 출혈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데도 의사들은 왜 환자에게 ‘지켜야 할 처녀막’을 강조할까. 최 전문의는 “이 사회가 처녀막을 계속 처녀성과 연관 지어 이야기한다. 처녀막에 대한 신화가 있는 사회다. 그러다 보니 의사들도 의료행위 중 처녀막 손상이 생기면 환자에게서 항의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방어적이 된다. 성 경험이 없으면 질 초음파는 안 된다고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삽입형 생리대(탐폰), 생리컵 등을 이미 쓰고 있다면 질 초음파 검사로 처녀막 손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여성들이 산부인과에서 겪는 의료 경험에 대한 문제제기는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김제이 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 활동가는 “중요한 건 어떤 진료를 왜 이렇게 하는지 정확하게 존중하는 태도로 전달하면 될 텐데, 일반 의료 현장서 의사들이 질이나 자궁과 같은 신체 부위에 대해선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의료인 중심이 아닌 환자 관점에서 의료 행위를 진행해야 하는데, 문제제기를 하면 의사들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다. 의료 서비스를 받는 당사자가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끔 관련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의료 행위의 기본이다”라고 했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