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방영된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한 장면. 방송화면 갈무리
내레이션도, 전문가 논평도 없다.
지난 12일 방송된 <한국방송>(KBS)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이하 <국가대표>)는 오로지 여성 운동선수들의 인터뷰와 방대한 아카이브에서 골라낸 자료 영상으로 48분을 빼곡하게 채운다. 카메라 앞에 선 박세리, 김연경, 남현희, 김온아, 지소연, 정유인 등 6명의 여성 선수는 한국 스포츠계 성차별에 대해 날 선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자신이 마주해야 했던 편견과 차별, 이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을 담담히 이야기할 뿐이다.
“국가대표 선수들 활약 보려고 들어왔다가 ‘이퀄 플레이 이퀄 페이’(동일경기 동일임금) 외치면서 나갑니다.”
방송 직후 시청자 게시판 쏟아진 70여 페이지가 넘는 응원 글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서 자신의 실력과 경기력으로 편견과 차별을 돌파한 여성 선수들을 향한 뜨거운 공감이 담겼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신관에서 만난 <국가대표>의 이은규 피디(PD)와 김선하 작가는 “하소연이 아닌 직업인의 성장담”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유명인이 나온다고 하니까 당연히 성공스토리겠지 하고 보게 되지만, 보고 나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겪는 대우의 차이와 같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게끔 하고 싶었어요.”(이은규 피디)
<한국방송> 이은규 피디가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신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추적60분> 등에서 피디와 작가로 종종 호흡을 맞춰 온 이 피디와 김 작가는 지난해 6월 방영된 <개그우먼>을 시작으로 지난 4월 <다큐멘터리 윤여정>, 이번 <국가대표>까지 세 차례 연속 함께 작품을 내놓았다. 여성 예능인들을 ‘직업인’으로 새로 조명해 호평을 받았던 <개그우먼>의 성공은 이 피디와 김 작가가 여러 직군 여성들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연이어 제작하는 기틀이 되었다.
“그때도 이번처럼 많은 시청자가 시청자 게시판에 좋은 반응을 보여줬고 ‘다른 직군들도 시리즈 연작으로 보고 싶다’는 의견들을 주셨어요. 그래서 올해 3부작 정도 더 이어서 해보자고 해서, 윤여정 배우와 국가대표를 다룬 다큐가 나온 거죠.”(김선하 작가)
세 작품 중 <개그우먼>과 <국가대표>는 내용·형식적으로 유사하다. 세대나 활약상이 조금씩 다른 6명의 여성 직업인들이 발화자로 등장한다. 이성미·박세리와 같은 ‘선구자’들은 남초적 직업 세계의 ‘판’을 흔들며 없던 길을 만들고, 송은이·김연경과 같은 ‘게임체인저’들은 실력과 독창성으로 낡은 규칙에 큼직한 균열을 낸다.
“‘셀럽 다큐’라고 하면 과거 박지성 선수 다큐처럼 한 사람의 일상과 인간적인 면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법도 있을 텐데요. 저희는 오로지 인터뷰 촬영만 해서 출연자들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동시에 ‘이들이 결국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구나, 시대적으로 관통하는 어떤 지점이 있구나’ 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이은규 피디)
따라서 두 작품은 각각의 직업 세계에서 판을 바꿔온 여성들의 계보를 그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지난 12일 방영된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한 장면. 방송화면 갈무리
제작진은 당사자 목소리를 온전히 담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은 최대한 줄였다. 흔히 다큐멘터리에 등장하곤 하는 내레이션이나 전문가 인터뷰는 일부러 넣지 않았다. “개인의 서사를 제작진이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가르치듯이 이야기하는 것”(김선하 작가)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프리젠터’라는 다른 다큐멘터리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발화자를 추가했다. <개그우먼>의 경우 <개그콘서트>를 연출했던 김상미 PD가, <국가대표>는 오랫동안 여성 스포츠 선수들을 취재해왔던 박주미 <한국방송> 스포츠 기자가 그 역할을 맡았다.
“본인이 본인의 성취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사실 대단히 낯간지러운 일일 수 있잖아요.(웃음) 하지만 그들의 성취를 점수 매기듯 평가하는 게 아니라, 곁에 일했던 동료로서, 같은 직군의 여성 동료로서 의미를 이야기해줄 사람이 1명 정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이은규 피디)
반면 <한국방송> 아카이브에서 수개월에 걸쳐 골라낸 중계화면들은 여성 선수들이 마주한 편견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경기를 웃으면서 할 수는 없냐”는 조영남의 질문을 받는 박세리 선수의 모습, 여자배구가 남자배구와 달리 “아기자기”하다고 평가하는 중계진 멘트, 여성 운동선수들에게 덧붙는 “탁구여신” “얼짱” “미녀 배구군단”과 같은 수식어들. 이은규 피디는 “이게 바로 아카이브의 힘이다. 과거에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오늘날 다시 소환했을 때 뜨악한 지점들, 그 지점에서 저희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인간적인 후일담이나 전문가 평론 없이도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여성 운동선수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뒤 ‘김치찌개 회식’을 해야 했던 김연경 선수를 비롯한 여자배구 선수들은 수년간 목소리를 내온 끝에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지난 올림픽 대비 3배의 파견비 증액을 이끌어낸다. “여자가 무슨 축구냐”는 소리를 들으면서 운동을 시작했던 지소연 선수(첼시 FC위민)는 잉글랜드 여자축구 리그에서 지난 7년 간 10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최초의 비영국인 선수가 된다. 다큐멘터리에서 김 선수는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고, 지 선수는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난 12일 방영된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한 장면. 방송화면 갈무리
방송 뒤 뜨거운 반향이 따랐지만 <국가대표> 제작진은 이제 겨우 질문을 시작했을 뿐이라고 했다. 영국 <비비시>(BBC)는 2014년부터 전세계 종목별 성별 상금 격차를 비교한 통계를 발표하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지속해서 보도하고 있다. ‘체인지 더 게임(Change The Game)’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선수의 경기 중계를 늘리기 위한 캠페인도 벌인다. 이런 노력에 비하면 공영방송인 <한국방송>의 이번 다큐멘터리는 초보적 질문을 던지는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저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별에 따른 상금 격차든 미디어 노출의 차이든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이죠. <국가대표>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거기서 질문을 시작해보자고, 그렇게 첫발을 내딛는 다큐라고 저는 생각해요.”(이은규 피디)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