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성희롱? 독일이라면 어떨까? 물론 흔하게 있지도 않은 일이지만, 있다고 해도 분명 세상은 여자들의 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 독일 사회는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피해자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인다. 삼성전기 전자영업팀에 근무하던 이은의 씨는 상사에게 지속적으로 당한 성희롱을 최사 측에 공식적으로 알렸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부서 내 따돌림과 인사상의 불이익이었다. 이 일로 이은의 씨는 수년 째 삼성이라는 거대한 조직에 맞서 소리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죽음까지 생각해 볼 정도로 절박한 그녀에게 언론은 입을 열어주지 않고 있으며, 그 때문에 실상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그녀의 얼굴은 야위어만 가고 있다. 독일 땅이었다면 그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왔을까 생각하니 우리들의 무관심이 내겐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독일사회가 한국과 가장 다르게 다가왔던 것은 이들의 성에 대한 인식이었다. 외향에서 풍기는 고요함과 보수적인 생활태도와는 다르게 성에 대해서는 개방되어 있는 이들 사회가 우리나라의 그것과 많이 비교됐다. 그러나 서로가 합의한 성에 대해서는 개방되어 있지만 일방적인 성희롱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도 마다않는 폐쇄(?)된 사회가 바로 여기다. 40대 중반 나정도 나이 우리나라 여자들이라면, 으슥한 골목길이나 심지어 여학교 때 창밖으로 보이는 학교 뒷산에서라도 바바리맨 한 번 보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바리맨을 잡기위해 경찰이 출동한 일은 거의 없었다. 사회 곳곳에서 심심찮게 경험하는 유쾌하지 못한 작은 성희롱 사건들. 차가 붐빈다는 이유로 심하게 비벼대는 아주 평범한 회사원들. 한국에서 만원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마다 그것은 참아야만 하는 여자들의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자주는 아니지만 여러 번 만원버스를 타본 적이 있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할 비좁은 공간이었지만 심하게 몸을 들이대는 사람들은 없었다. 남자들이 오히려 더 조심하는 눈치였다. 한국 남자들에게 또 한 번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 원 참,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니만. 나쁜....., 욕이 저절로 나왔다. 이곳에서도 성폭력 사건은 사회면을 장식하는 단골메뉴이긴 하지만, 한국에서처럼 골목길이나 공공 버스 안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10년 동안 단 한 건도 본적도 당해본 적도 없으니 한국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인 것만은 확실하다. 처음엔 인적이 드문 길에서 먼발치에 남자 혼자 걸어오면 가슴부터 덜컹 내려앉곤 했지만 요즘은 그런 느낌들에 점점 둔감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나도 많이 이 사회의 분위기에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어학연수를 하는 동안 일어났던 일이다. 어떤 터키 남자가 아시아 여자들만 골라서 버스 안에서 성희롱을 한다는 소문이 학교에 돌기 시작했다. 그 피해자는 당장 우리 반 한국 아가씨와 한 아기엄마였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던 아가씨가 갑자기 들이닥친 괴한 때문에 비명을 지르면서 사건은 학교 내에서 표면화되었다. 그녀를 교직원실로 부른 교사들은 돌아가면서 질문을 해댔다. 이 일을 입에 올린다는 사실에 심하게 수치심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독일어도 유창하지 못했던 그녀가 속 시원히 진상을 설명하지 못하자, 교사들은 마침내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했다. 처음에 놀라기는 했지만 보통의 한국 여자들처럼 일이 커지자 범인을 잡으려는 생각보다는 빨리 어떤 방법으로라도 마무리되기만을 바랐던 아가씨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여러 번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온 도시의 범죄자 명단을 뒤져야 했다. 그 과정에서 버스 안에서 외모가 같은 남자에게 당했다는 한국인 아기엄마 이야기를 하게 됐고, 다음날 아기엄마는 경찰서에 가기 전에 교직원실로 먼저 불려갔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그녀는 울면서 교직원 실에서 여교사로부터 성희롱보다 더 심한 모욕을 당했다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 곳에 있던 여선생은 대뜸 ‘넌 버스 안에서 그 남자의 성희롱을 즐긴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소리도 지르지 않고, 경찰에 알리지도 않았다는 건 말도 안 돼.’라며 진실을 말하라며 추궁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생각은 성희롱에 침묵하는 한국 여성들은 모두 그 일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네 성폭력 사건이 으레 그렇듯, 가해자 보다 피해를 당한 여자들이 더 숨기려하는 특이한 한국 문화를 설명하기에 그녀의 독일어 실력은 너무 모자랐고, 마침내 통역까지 대동해서 시도 했지만 독일 사람들이 이와 같은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사건을 일으키고 다니는 범인도 그런 아시아 여자들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타깃을 삼았던 것 같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나도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지만 한국에서 우리가 처했던 환경을 생각하면 문득문득 울화까지 치밀곤 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작은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경찰서를 찾았다가는 아마 주변 사람들의 비아냥거림부터 견뎌내야 할지 모른다. 그런 일이 이곳에서는 이다지도 심각한 범죄행위였다니. 여하튼 두 사람은 그 일로 뻔질나게 경찰서 문을 들락거렸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는 못하고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그렇다. 독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독일 여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사건이 발생하면 남자보다는 그 일을 야기한 책임을 은근히 피해 당사자인 여성에게도 물으려는 듯한 사회 분위기, 이곳에 오면 생매장 감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일상처럼 일어나는 작은 성희롱으로부터도 이 사회가 안전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장난 한번 쳤다가는 뼈도 못 추리게 생겼으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어느 누가 감히 그 짓을 하겠는가 말이다. 관련글 : 한국사회, 끝내 제2의 장자연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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