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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기억합니다] 사진으로 보는 김군자 할머니의 ‘아름다운 삶’

등록 2017-07-25 17:24수정 2017-07-26 21:55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돈쓰기’
아름다운재단이 2013년 5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기념 부조를 제작하면서 붙인 말입니다.
7월23일 오전 8시4분 우리 곁을 떠난 김 할머니는 2000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습니다.
장사하며 모은 돈과 정부 생계지원금 등을 천원 남짓한 음료수 한 병 허투루 사 먹지 않고 모아 자신처럼 부모를 잃고 배움의 기회에서 멀어진 학생들을 위해 내놓은 겁니다.
할머니는 일본 정부가 진심으로 사죄하고 피해 배상을 하면 그 돈 역시 사회에 기부하려 했습니다.

<한겨레>는 김군자 할머니의 영면을 맞아 할머니의 삶을 다시 돌아보려 합니다.
‘위안부’ 피해를 세상에 널리 알린 ‘용감한 증언자’로, 수백 명 학생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게 도와준 ‘기부 박사’로 할머니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할머니는 ‘용감한 증언자’

문재인 대통령은 2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할머니를 “강인한 생존자, 용감한 증언자”라고 말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2015년 12월31일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방문해 할머니를 직접 만난 인연이 있습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15년 12월31일 오후 경기도 광주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 나눔의 집을 방문해 김군자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15년 12월31일 오후 경기도 광주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 나눔의 집을 방문해 김군자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문 대통령의 말마따나 할머니는 용감했습니다. 10년 전인 2007년 2월15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하원 외교위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 청문회장. 당시 여든한 살이었던 할머니는 이용수 할머니, 네덜란드 출신 ‘위안부’ 피해자 얀 루프 오헤른과 함께 증인으로 출석해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했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기 전에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국 땅까지 오게 됐다. 내 몸 곳곳에는 너무나 많은 흉터들이 남아 있고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았다.”

“위안소에서 하루 평균 20명, 많게는 40명까지 일본군을 상대하는 지옥과 같은 생활을 했다. 우리는 지금 돈을 원하는 게 아니며, 그들이 저지른 인권 유린과 전쟁 범죄 행위에 대해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많은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죽었지만 역사는 살아있을 것이다. 망가진 내 인생을 돈으로 보상할 수 없다.”

2007년 2월15일 오후(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하원 외무위에서 열린 ‘위안부’ 청문회에서 피해 할머니들이 방청석에서 참관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군자 할머니다. 국회사진기자단
2007년 2월15일 오후(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하원 외무위에서 열린 ‘위안부’ 청문회에서 피해 할머니들이 방청석에서 참관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군자 할머니다. 국회사진기자단
그날의 증언처럼 할머니의 삶은 힘겹고 외로웠습니다. 1926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10살에 아버지를, 14살에는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친척집에서 자랐고 17살 때 심부름을 나갔다가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끌려갔습니다.

3년간의 ‘위안부’ 생활 동안 자살 시도만 7번. 일본 군인에게 맞아 고막이 터져 평생 왼쪽으로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일제가 패망한 뒤 38일을 걷고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위안부’ 이후의 삶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끌려가기 전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와 동거하며 짧은 행복을 누렸지만 집안의 반대로 남자는 스스로 목숨을 끓었습니다. 그 뒤 혼자 딸을 낳았지만 5개월 만에 숨졌습니다. 그때부터 1998년 나눔의 집으로 오기까지 할머니는 혼자 살았습니다.

“외로웠어. 혼자 살았으니까. 그게 제일 힘든 거지 뭐.” 생전 할머니는 살아오면서 무엇이 제일 힘들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군자 할머니가 2007년 3월1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나눔의 집에서 열린 2007나눔의 집 정월 대보름 지신밟기 행사에서 지난 미 의회 청문회 참가 소감을 말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군자 할머니가 2007년 3월1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나눔의 집에서 열린 2007나눔의 집 정월 대보름 지신밟기 행사에서 지난 미 의회 청문회 참가 소감을 말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할머니는 외로움과 고통 속에 갇히길 거부했습니다. 나눔의집 입소 뒤 할머니는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공식 사죄·배상을 받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국내와 일본을 돌며 증언에 나섰고, 2003년엔 한국 정부가 1965년 ‘한-일 회담’ 문건 공개를 하지 않겠다고 밝히자 항의 표시로 국적 포기 신청을 내기도 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가 2015년 12월29일 오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에서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이 방문해 대화를 하던 중 고개를 떨구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가 2015년 12월29일 오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에서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이 방문해 대화를 하던 중 고개를 떨구고 있다.
호통도 마다치 않았습니다.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체결 뒤 임성남 외교부 1차관과 조태열 당시 외교부 2차관이 나눔의집을 찾았을 때 일입니다. “할머니들이 만족스러워하지 못한다는 것은 알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는 조 차관의 말에 할머니는 “정부끼리 한 합의는 인정 못 한다. 죽기 전에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달라”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기부 박사’

1998년 입소 뒤 평생의 보금자리가 된 나눔의집 할머니 방문 앞에는 박사 가운을 입은 할머니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아래 ‘기부 박사’라고 적혀 있었다고 아름다운재단은 전합니다.

2000년 8월30일 아름다운재단에서 열린 김군자 할머니 기금 전달식. 사진 아름다운재단 제공
2000년 8월30일 아름다운재단에서 열린 김군자 할머니 기금 전달식. 사진 아름다운재단 제공
할머니와 아름다운재단과의 인연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름다운재단 ‘1호 기금 출연자’인 할머니는 갓 출범한 재단에 5천만원을 선뜻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고아였거든. 배운 것이라곤 야학 8개월이 전부야. 어려서 부모를 잃고 못 배운 탓에 삶이 그렇게 힘들었던 것만 같아서…. 조금 배웠더라면 그렇게 힘들게 살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들이 배울 기회만이라도 갖도록 돕고 싶어. 그런데 너무 작은 돈이라 부끄럽고 미안해.”

2000년 8월30일 아름다운재단에서 열린 김군자 할머니 기금 전달식에서 김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쓴 ‘나눔의 잎’을 달고 있다. 어려운 가정환경과 ‘위안부’ 강제 동원으로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김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사진 아름다운재단 제공
2000년 8월30일 아름다운재단에서 열린 김군자 할머니 기금 전달식에서 김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쓴 ‘나눔의 잎’을 달고 있다. 어려운 가정환경과 ‘위안부’ 강제 동원으로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김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사진 아름다운재단 제공
2000년 8월30일 아름다운재단에서 열린 김군자 할머니 기금 전달식에서 김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쓴 ‘나눔의 잎’을 달고 있다. 어려운 가정 환경과 ‘위안부’ 강제 동원으로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김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사진 아름다운재단 제공
2000년 8월30일 아름다운재단에서 열린 김군자 할머니 기금 전달식에서 김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쓴 ‘나눔의 잎’을 달고 있다. 어려운 가정 환경과 ‘위안부’ 강제 동원으로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김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사진 아름다운재단 제공
더 내지 못함을 미안해하던 할머니는 기어코 2006년 5천만원을 더 모아 재단에 기부했습니다. 할머니의 저축 비결은 이랬습니다.

“가만 보니까 1년 동안 아껴 모으면 1천만원은 모을 수 있더군. 돈 많은 양반들에겐 별거 아니겠지만, 나한텐 쉽지 않았어요. 옷이야 몸에 냄새나지 않을 정도만 갖추면 되는 거고, 먹고 자는 거야 몸 누일 곳이 있으니 됐고. 돈이 들어오면 그저 아이들에게 장학금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차곡차곡 모은 거야. 모쪼록 부모 없이 공부하려고 고생하는 아이들에게 잘 전해줘요.”

2014년 12월1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추천포상 수여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평생 모은 재산 1억 여원을 기부한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씨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4년 12월1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추천포상 수여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평생 모은 재산 1억 여원을 기부한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씨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6년 추석 나눔의 집을 찾아온 ‘김군자할머니기금’ 장학생들에게 김군자 할머니가 훈장(국민훈장 동백장)을 보여주며 웃고 있다. 사진 아름다운재단 제공
2016년 추석 나눔의 집을 찾아온 ‘김군자할머니기금’ 장학생들에게 김군자 할머니가 훈장(국민훈장 동백장)을 보여주며 웃고 있다. 사진 아름다운재단 제공
2016년 추석 나눔의 집을 찾아온 ‘김군자할머니기금’ 장학생들이 선물한 편지를 김군자 할머니가 들고 있다. 사진 아름다운재단 제공
2016년 추석 나눔의 집을 찾아온 ‘김군자할머니기금’ 장학생들이 선물한 편지를 김군자 할머니가 들고 있다. 사진 아름다운재단 제공
할머니의 5천만원으로 시작한 ‘김군자할머니기금’은 709명의 기부자와 함께 11억원 규모로 커졌고 2017년 7월 기준 250명의 아동보호시설 퇴소 대학생들이 학비를 지원받았습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네팔 강진피해 구호 성금 전달식이 열린 2015년 5월12일 오전 서울 광진구 영화사에서 부산에서 온 이옥선 할머니(왼쪽부터), 김군자 할머니, 송월주 스님, 나눔의집에서 온 이옥선 할머니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네팔 강진피해 구호 성금 전달식이 열린 2015년 5월12일 오전 서울 광진구 영화사에서 부산에서 온 이옥선 할머니(왼쪽부터), 김군자 할머니, 송월주 스님, 나눔의집에서 온 이옥선 할머니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할머니는 아름다운재단 이외에도 천주교 수원교구청에 1억원, 나눔의집에 1천만원을 기부했고 2015년 5월에는 나눔의집 할머니들과 5백만원을 모아 네팔 강진피해 구호 성금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장례비용 5백만원을 빼곤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할머니가 남긴 ‘위대한 유산’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7월10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집을 방문해 김군자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며 손을 꼭 잡고 있다. 광주/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7월10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집을 방문해 김군자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며 손을 꼭 잡고 있다. 광주/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10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집을 방문해 김군자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며 손을 꼭 잡고 있다. 광주/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10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집을 방문해 김군자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며 손을 꼭 잡고 있다. 광주/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7월10일은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담긴 날입니다. 할머니는 나눔의집을 찾은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을 만나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마지막 유언처럼 이 말을 남기고 2주일 뒤 할머니는 영면에 들었습니다.

이별을 예감했던 걸까요. 지난 5월 생신날 만난 아름다운재단 간사들에게는 “삶이 기구해서 내 팔자만 이런가 싶어 한스러울 때가 많았는데, 돌아보니 내 가진 것을 다 주고 살만큼 살아서 후회가 없다. 그러니 부디 즐겁게들 살아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2013년 5월27일 기념부조 제막식에 참석한 김군자 할머니. 사진 아름다운재단 제공
2013년 5월27일 기념부조 제막식에 참석한 김군자 할머니. 사진 아름다운재단 제공
그렇게 전 재산을 베풀고도 할머니는 ‘위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바로 250명의 장학생입니다. 한 학생은 생전 할머니에게 띄운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할머니께서 기부해주신 덕분에 등록금을 댈 수 있었습니다. 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고 다시 돌아봐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 나눔의집·아름다운 재단 누리집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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