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대학 내 성폭력으로 산재를 신청한 남정숙 전 성균관대 교수. 본인 제공
이것은 정당한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다. 성폭력은 근무 중에 발생했다. 가해자를 감싸고 상황을 축소하려 하고 피해자를 내쫓은 쪽은 자신을 고용한 학교였다. 대학 내 성폭력을 고발했던 남정숙 전 성균관대 교수가 8일 근로복지공단 서울지역본부에 산재 신청서를 낸 이유다.
그는 “직장 내 성폭력은 개인적인 잘못이 아니라 성차별, 성적 침해, 괴롭힘으로 건강을 위협하는 사회적 위험으로 이를 예방하지 못한 조직과 국가의 책임”이라고 했다. 지금까진 르노삼성, 장학재단 남도학숙,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방문판매 노동자, 새마을금고 직원 등이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으로 산재를 인정받았다. ‘미투’ 운동이 시작된 뒤 대학 내 성폭력으론 첫 산재 신청이다.
“학교는 극도로 폐쇄적인 피라미드 구조다.” 남 전 교수는 말했다. 대학교는 소수의 정교수를 제외하면 모두가 ‘을’이 되는 구조다. 계약직 교수, 시간제 강사, 박사과정 연구원, 석사과정의 대학원생과 학부생들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받치는 이들이다. “저도 석사과정 때 정말 힘들었어요. 머슴도 그런 머슴이 없었어요. 그 때 선생님이 여관을 가자고 질질 끌고 갔었거든요.” 생사여탈권을 쥔 소수는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해도, 상대의 불안한 신분을 미끼로 침묵이란 대가를 얻는다. 대학 내에서 ‘미투’ 운동이 널리 번지지 않았던 이유다.
남 전 교수는 문화콘텐츠 개발 분야의 전문가였다. 여러 지역 축제의 총감독을 맡았고, 2006년 문화관광부 장관상도 수상했다. 예술의전당,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발전 전략도 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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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케팅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여성’으로만 취급받기 시작한 건 성균관대학교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경현 전 교수는 학생들과 함께 한 엠티(MT) 자리에서도, 외부 인사와의 미팅 자리에서도 “남 선생님과 잘 거니까 우리 둘이 잘 방을 따로 잡아놔라”, “내가 남 교수가 마음에 들어서 어찌 해보려고 했더니 단호하게 거절해서 혼났다”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강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려 했고, 숙소까지 들어와 성추행을 했다.
그의 행위가 학교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대학원생들이 익명의 탄원서를 교내 성상담센터에 보내면서다. 이 전 교수가 학생과 교수에게 성희롱을 하고 대학원 운영이 미숙하니 적절한 조치를 취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학교는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전부터 피해 대상에서 남 전 교수를 배제해 사건을 축소하려고 했다.
당시 교원인사팀장 ㄱ씨는 “같은 학교에서 이경현과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하니까,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하면 좋지 않으니까, 기분은 매우 언짢았으나 성적 수치심은 느끼지 않았다고 (경위서에) 쓰고 교수들은 빠져라. 학생 사건만 조사하고 교수 성추행 사건은 조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냐”고 요구했다.
예술대학 학장 ㄴ씨는 징계위원회에서 “피고 이경현이 이번 일로 너무 피해를 봤다. 옆에서 보면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사형선고 수준이다. 같은 소속 교수로서 너무 안됐다. 징계를 받더라도 원만하게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학교는 곧 모든 학사회의에서 남 전 교수를 배제했고, 그의 강의를 없앴다. 이 전 교수에겐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내렸고 남 전 교수는 해임됐다. 후임교수인 ㄷ씨는 “못생긴 여자가 정교수 되려고 성폭력 사건을 꾸민 것”이란 말을 하고 다녔다.
남 전 교수는 이 같은 내용을 산재 청구이유서에 낱낱이 기록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 진단서까지 함께다. 그는 “이 사건 전에는 어떤 정신적인, 육체적인 상해도 없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건강검진 자료 10년치를 같이 제출했다”고 했다.
그는 가해자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 모두 승소했다. 형사소송 2심 재판부는 1심보다 더 무거운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산재신청을 한 건 직장 내 성폭력을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닌 ‘노동 문제’로 봐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전국미투생존자연대를 꾸려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있기도 한 그는 “성폭력 경험이 있고 이를 고발한 피해자들에겐 그 이후 진행되는 재판이나 2차 가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경험을 공유하는게 절실하다”며 “이런 방법도 있다는 걸 알리고 선례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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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성폭력 문제를 고발하는 건 사실 피해자들한테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잖아요. 일단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에게만 너무 많은 초점이 맞춰지고요. 하지만 저는 이게 곧 사용자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라고 봐요. 이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이 뒤따라야 하는 범죄인 거죠. 나 하나가 참고, 창피해하고, 숨어야 하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박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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