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블레스유2>(올리브)의 출연자 장도연(왼쪽부터), 박나래, 김숙, 송은이. 프로그램 누리집 갈무리
“여성 예능인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지난 수년간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 예성 예능인을 두고 방송계 안팎에서 나오는 평가다. 2018년 개그우먼 이영자씨는 <한국방송(KBS)>과 <문화방송(MBC)>의 연예대상을 동시에 받으며 2관왕에 올랐다. 2019년에는 박나래씨가 문화방송에서, 지난해에는 김숙씨가 한국방송에서 연예대상을 받았다.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를 계기로 ‘기획자’로 활동영역을 넓힌 송은이씨는 여성 예능 전성기의 중심에 섰다. ‘여성 예능인의 비약’은 근래 5년간 예능계 흐름을 읽는 핵심 키워드다.
하지만 한국 예능계는 정말 이러한 활약에 걸맞는 젠더 감수성을 갖추고 있을까? 여전히 한국 예능계의 주류는 ‘70년대생 남성 진행자’다. 예능계 트랜드로 자리잡은 ‘가족 관찰형 예능’에서는 부부싸움·고부갈등 등 가부장적 상황극이 반복된다. 여성 출연자에 대한 외모 평가나 애교 요구는 잊을 만하면 구설에 오른다.
영화 ‘젠더 개념’ 테스트하는 ‘벡델테스트’…예능에 해보니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은 1985년 영화가 최소한의 젠더 개념을 갖췄는지 확인하게 위해 간단한 기준 세 가지를 고안했다.
첫째,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등장할 것. 둘째, 이들이 서로 한번이라도 대화할 것. 셋째, 대화내용이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닐 것. 최소한을 염두에 두고 설정한 기준이지만, 대부분의 영화는 이 낮은 허들을 넘지 못한다. 영화진흥위원회가 펴낸 ‘2018 한국영화 산업 결산’을 보면, 2017년 개봉한 순제작비 30억원 이상의 한국 실사영화 39편 중에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10편(25.6%)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예능에 ‘벡델테스트’를 적용해보면 어떨까? 영화를 위해 고안된 허들을 예능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으니 <한겨레> 젠더팀이 기준을 예능에 맞게 변형해봤다.
첫째, 주요 출연자 중 여성의 성비가 30% 이상일 것.
둘째, 여성 출연자에게 아내·며느리·딸 등 가부장적 성역할을 부여하지 않을 것.
셋째, 여성 출연자에 대한 외모 평가를 하지 않을 것.
남성들로만 구성된 출연진, 여성 출연진에게 부여된 가부장적 성역할, 여성 출연자에 대한 외모 평가는 한국 예능의 고질병이다. 이 세 가지가 없는 예능은 얼마나 될까. 물론 이 기준들은 최소한의 젠더감수성을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주 낮은 허들이다
테스트 대상 예능 프로그램은 방송통신위원회 방송콘텐츠 가치정보 분석시스템(www.racoi.or.kr) 내 인터넷 반응 DB 속 시청자버즈(동영상조회 기준) 순위에서 골랐다. 상위 12개 프로그램의 1월 셋째주 방영분(1월18일~24일)을 분석했다. 다만 예능과 음악 프로그램의 경계에 있는 경연 프로그램들은 제외했다.
<우리 이혼했어요>의 출연한 유깻잎과 최고기. 프로그램 갈무리
‘성비’ 문턱부터 탈락 5개…예능 절반은 여성 출연자가 ‘며느리·아내·엄마’로
첫 번째 기준인 출연자의 ‘성비’부터 난관이었다. ‘여성 30%’라는 낮은 문턱을 넘어선 프로그램은 12개 중 7개에 불과했다. 문턱을 넘지 못한 프로그램들 중에는 주요 출연자나 진행자 중 여성이 한 명도 없는 예능이 4개나 됐다. 출연자의 성비가 30%를 넘어선 예능도 대부분 ‘1호가 될 순 없어’, ‘아내의 맛’ 등 가족이 등장하는 관찰형 예능이 대부분이었었다. 부부가 등장하니 성비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룰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족 관찰 예능들은 대개 두 번째 문턱을 넘지 못했다. 여성 출연자에게 가부장적 성역할을 부여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전체 12개 중 6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절반의 예능에서 여성 출연자들은 누군가의 아내·엄마·며느리로 등장했다.
특히 이러한 ‘가족 관찰 예능’에서는 이른바 ‘정상가족’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장면이 많았다. <티비조선>의 ‘우리 이혼했어요’에서는 진행자들이 이혼한 여성 출연자(유깻잎)가 전 남편(최고기)의 바람과 달리 재결합을 택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신동엽: 새롬씨 말처럼, 깻잎이 가장 큰 산이었네요.
김원희: 우리는 화면을 봐서 그게(시아버지의 변화) 믿어지는 건데, 깻잎씨는 당사자니까 과연 그 말이 일시적인 것인건가 진짜로 그게 될 것인가 이런 우려가 큰 것 같아요.
신동엽: (최고기가) 아버지랑 했던 말들을 제대로 전달을 못했어요.
김원희: 아버지가 니네가 행복하다면 내가 빠지겠다. 안 나타나겠다. 저는 이게 가장 강력하게 마음을 풀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진심을 전달을 못한 것 같아요.
(자막 : "재결합의 키, 너희 앞에 안 나타날게”)
신동엽: 두 사람이 저 대화를 나눌 때는 ‘우리 이혼했어요’ 방송을 못 봤을테니까 아버님의 마음, 진심을 아마 화면을 보면 깻잎도 느끼지 않을까.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예능의 트랜드인 관찰 예능에서는 남녀 성비가 동등하게 출연하더라도, 출연자들에게 드리워지는 시선은 굉장히 보수적이거나 가부장적인 경우가 많다. 특히 스튜디오의 진행자들이 관찰 카메라에 담긴 출연자들의 행동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가부장적 시각에서 비롯되는 차별적인 코멘트들이 덧붙는다”고 짚었다.
출연자 성비가 남성과 여성이 엇비슷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여성은 독립적인 주체 보다는 남편과 자식, 시부모 등으로 구성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구성원으로 등장했다. 스튜디오에서 이를 관찰하는 진행자들은 이들이 ‘정상가족’의 일원으로서 행동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며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했다.
라디오스타 704회 방영분 중. 프로그램 갈무리.
한국 예능 고질병 ‘외모평가’…“이마로 헤딩 천 번한 것 같다” “살이 올랐다”
한국 예능의 고질병이라고 할 여성에 대한 외모 평가가 등장하지 않는 예능은 거의 없었다. 12개의 예능 중 9개의 예능에서 진행자가 여성출연진의 외모를 평가하거나, 외모가 농담 소재로 쓰였다. 특히 <티비조선>의 ‘아내의 맛’에서는 출연자의 외모 평가가 수시로 등장했다. 한 여성 출연자는 다른 남성 출연자로부터 “이마로 헤딩을 천 번한 것 같다”, “뭐 하나 넣었구나”라는 등의 말을 들었다. 한 남성 출연자는 “미녀들이 제철 음식을 잘 먹어요”라는 여성 출연자의 말에 “그동안 제철음식 못 드신거에요?”라고 대꾸했다.
<문화방송(MBC)>의 라디오스타(704회분)에도 뜬금없이 외모 평가가 등장한다. 유명 유튜버 ‘쯔양’이 게스트로 출연한 회차다.
쯔양: “유튜브에서 먹방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고, 100만 찍는데 6개월, 현재는 300만 구독자구요. 먹으면서 일하고, 돈도 버는 그런 신의 직장을...”
김구라: “제가 쯔양하고는 제가 했던 마리텔에서 보고 1년만에 보는데 약간 지금 많이 먹어서 살이 그때 보다 올라온 것 같아요.”
(자막 : “살짝 통통해진 듯?”)
쯔양: “턱이 여기 조금 계속 붙더라구요.”
김구라: “지금 약간 젊은 시절 노사연씨 느낌이 살짝...” “오 있네, 있네.”(지상렬)
(자막 : “젊은 시절 노사연 느낌”)
안영미: “노사연씨가 보인다구?”
여에스더: “영미씨, 이 남자들을 어떡하면 좋아요? 쯔양씨 안그래도 떨려가지고 첫 방송이어서 힘든데 갑자기 노사연씨가 웬말이에요”
김구라-이봉원 : “분위기 좋은데 왜 그래요?”
(자막 : “갑자기 분위기 2:1 부부싸움”)
안영미: “난리났네 난리났어. 어디 노사연 모르는 사람 살겠나?”
이 대목에서는 출연자인 쯔양과 출연조차 하지 않은 가수 노사연씨에 대한 외모 평가가 동시에 벌어진다. 여성 출연자는 남성 진행자의 외모 평가에 뜨악해 하지만, 남성 진행자와 출연자는 “분위기 좋은데 왜 그래요”라며 오히려 여성 출연자를 나무라는 상황도 연출된다. 쯔양이 “노사연씨의 곡을 종종 듣는다”고 웃어넘기면서 뜬금없는 외모 평가는 어색하게 종료된다.
예능 벡델테스트 12개 중 1개만 통과…주요 제작진 중 여성은 30%에 불과
결과적으로 ‘예능형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프로그램은 12개 중 ‘윤스테이’ 하나뿐이었다. 대중문화 평론가들은 재능 있는 여성 예능인들의 인상적인 활약에도 불구하고, 예능 프로그램들이 기존의 남성중심적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지목한다. 프로그램의 의사결정자들이 여전히 남성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과, 프로그램의 주 진행자(MC)가 ‘70년대생 남성’으로 정체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벡델테스트의 대상에 올린 12개 프로그램의 주요 제작진(기획·CP·메인PD)의 성비를 보면, 총 20명 가운데 여성은 6명(30%)에 불과했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과 서울 YWCA의 ‘2020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 보고서’를 보면, 보고서의 분석 대상이 된 12개의 프로그램 가운데 주 진행자 8명 가운데 7명(87.5%)이 30∼50대 남성이었다. 고정출연자 119명 중 ‘30∼50대 남성’은 40명(33.6%)에 이르는 반면, 30∼50대 여성은 14명(11.8%)에 불과했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작가나 게스트 출연자 가운데에서는 여성이 많지만, 제작현장을 좌우할 수 있는 CP 등 주요 제작진과 진행자들은 여전히 남성이 대부분이다. 여성 예능인에 대한 시청자들의 요구에 무딘 제작진들과 관성대로 여성 출연자를 대하는 남성 MC들의 자리가 너무 오랫동안 공고화 되어왔다”고 지적했다.
박세리(골프·왼쪽 넷째)를 중심으로 펜싱, 피겨스케이팅, 수영, 배구 등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출연하는 예능 <노는 언니>. <e채널> 누리집 갈무리</e채널>
‘노는 언니’·‘문명특급’ 남성 예능에 균열…“변화는 이제 시작”
벡델테스트 결과가 보여주듯 ‘여성 예능인 전성시대’는 갈 길이 멀지만, 남성 중심적으로 움직여왔던 한국 예능 세계는 최근 분명한 균열이 났다. 주요 출연진을 여성 스포츠 스타들로 채운 <이(E)채널>의 ‘노는 언니’는 지난해 8월 방영을 시작한 뒤 적잖은 반향을 얻고 있다.
<스브스뉴스>의 유튜브 예능 ‘문명특급’은 PD이자 진행자인 재재의 활약에 힘 입어 구독자가 100만명이 넘어섰다. 재재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정립한 인터뷰의 룰로 “첫째는 연애·결혼·사랑에 대해 묻지 않기다. 둘째는 싫은 거 강요하지 않는다. 셋째는 애교를 시키지 않는다”라고 밝힌 바 있다.
황 평론가는 “10년 전만 해도 메인MC가 남성이고, 그 남성이 여성 출연자의 외모를 평가하고, 출연자에게 애교를 주문하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최근 5년 사이에 예능계에도 ‘인식의 지진’이 발생하면서, 시청자들은 더이상 그런 행동을 웃어넘기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남성이 ‘뭉텅이’로 등장하는 예능에 의문을 품었고, 여성 예능인들이 능력에 걸맞는 자리를 줬을 때 얼마나 웃기고 재밌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여성 예능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자리잡은 만큼, 수년 내에 테스트의 결과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임재우 기자, 김혜인 교육연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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