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탁현민의 말달리자
살다 보면 이런저런 행사에 국으로 앉아 누군가의 ‘한 말씀’을 들어야 할 때가 적지 않다. 신기하게도 이 ‘한 말씀’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한 말씀’만 하시지 않는다. 일단 연단 앞에 서는 순간, 정해진 시간과 부탁한 주제는 말끔히 잊어버린다. 내용과는 상관없는 일장 아니 이장 삼장의 연설을 늘어놓는다. 준비해 온 원고를 척 꺼내서는 듣는 사람들과는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그대로 읽어 내리는 건 그나마 괜찮다. 엉뚱한 이야기를 끝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가는 연사를 만날 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다. 그것도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일으켜 세우면서 인사시키고, 되도 않는 질문이나 단 1%의 재미도 없는 농담을 던질 땐 말이다. 아! 순간 치솟는 살인충동을 자제하느라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다.
먹고살기 위해 공연이나 기념식을 기획한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연단 위에 세우는데 그중 가장 짜증나는 ‘한 말씀’의 주인공은 단연 정치인들 되시겠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절대 ‘한 말씀’만 하지 않으며 언제나 행사의 기획의도와는 무관한 말씀을 한다는 공통점을 갖췄다. 이들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자리라도 꼭 일어서서 한 말씀을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식전에 (임박해서) 알리는데, 보좌관이든 누구든 다른 사람을 시켜 연락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결국 한 자리 마련해 드리면 꼭 이렇게들 말씀하신다. “주최 쪽에서 굳이 한마디 하라고 하시니 짧게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그래 좋다. 누구든 때때로 한 말씀 해야 할 자리도 있고 한 말씀 들어야 할 자리도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말씀의 길이나 내용 그리고 무엇보다 듣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고려가 없는 한 말씀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살인충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란다.
탁현민 한양대 문화콘텐츠전공 겸임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