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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빵집, 산 증인들은 말한다

등록 2008-01-31 11:48수정 2008-02-08 13:52

군산 이성당 오남례 초대 사장
군산 이성당 오남례 초대 사장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수십년 된 윈도 베이커리들은 울고 웃는 역사를 갖고 있었다. 전국의 오래된 빵집을 찾아 제빵사와 경영자 등 증인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군산 이성당 오남례 초대 사장|

50년만에 찾은 일본인의 감격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열일곱에 시집와 팥을 삶다

군산 이성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보다 길다. 1945년 해방되자마자 일본인이 운영하던 양과자점 ‘이성당’을 한국인이 그대로 인수했다.


초대 사장 오남례(72) 할머니는 사진 플래시에 무척 수줍어했다. 오씨는 열일곱 되던 해 이성당 주인집으로 시집왔다. “그때(결혼했던 시기)가 인공(인민공화국)때야. 산에서 (빨치산이)내려와 하도 총질을 해서 어머니가 얼른 시집을 보내버렸지.” 그때부터 오씨의 청춘은 이성당과 함께 흘러갔다. 남편, 시어머니와 함께 경영의 한 축을 담당했다. 새색시는 팥을 직접 삶아 앙금을 만들었다.

양과자점을 인수했던 탓인지 초창기 이성당의 주력 상품도 양과자였다. 군산 꼬마들은 이성당 유리창에 기대 ‘센베’(전병), 아이스께끼, ‘앙꼬빵’, 사탕, 베이비만주(작은 만주)를 바라보며 학교를 다녔다. 70년대 중반 한국에 제과제빵 기능사 제도가 생기면서 기능사 자격을 가진 제빵사가 이성당 주방을 맡았다. 이때부터 이성당은 빵 맛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대 이호영 공장장을 시작으로 이인호, 이성열, 이삼묵 공장장이 이성당 주방에서 역사를 만들었다. 박보화 현 공장장은 ‘선임’들의 이름을 똑바로 외우고 있었다.

오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손님이 있다. 93년께 한 일본인 노부부가 빵집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는 고향을 다시 찾은 실향민의 표정으로 이성당 안팎을 살폈다. 그는 “해방 전 이성당이 있던 월명동 근처에서 소학교를 다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당시의 이성당을 기억하고 있었다. 패전 뒤 부모를 따라 고국으로 돌아간 소년은 커서 제법 이름난 음악가가 됐다. 부인과 함께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은 군산에서 그는 뜻하지 않게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빵을 팔고 있는 이성당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오씨에게 40년대의 월명공원과 군산 중앙로 거리를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그 뒤 그 일본인은 해마다 이성당을 찾았다. 그러던 발길이 멈춘 것은 2003년부터다. 그 일본인은 자신을 보도한 지역 신문을 선물로 줬다. 그러나 최근 내부 정리를 하며 자료를 버려 그 일본인의 이름을 알 도리가 없다고 이미정 실장이 설명했다.


|대전 성심당 이석원 공장장|

“제빵사들에 투자했습니다”

기능장 4명이나 배출 … 십수년 넘는 장기근속자 수두룩

대전 성심당 이석원 공장
대전 성심당 이석원 공장
“윈도 베이커리는 끊임없이 프랜차이즈와 자신을 차별화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대전 성심당의 이석원(35) 공장장은 ‘요리사는 덩치가 크고 손이 크다’는 선입견(?)을 확인시켜 줬다. 그는 35살이지만 제빵 경력은 18년이다. 현장에서 더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해 대학은 그만뒀다. 그는 지금 300여명에 불과한 제과 기능장 자격을 갖고 있으며, 대학에서 제과제빵을 강의한다. 키가 185㎝를 훌쩍 넘는 이 ‘열혈’ 제빵사는 성심당의 52년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20대 초반부터 14년째 성심당 주방을 지키고 있다.

임길순 초대 회장은 함경도가 고향이었다. 전쟁 통에 대전역까지 피난 온 그는 56년 역앞에서 찐빵 집을 열었다. 임 전 회장은 그전까지 제과제빵을 배운 적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미군정이 나눠주던 보급 밀가루를 이용해 찐빵을 만들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임 전 회장은 돈 받고 판 찐빵보다 무숙자들에게 나눠준 찐빵이 더 많았다고 이 공장장은 말했다. 성심당이란 이름도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마음’(성심)을 뜻한다. 68년 현재의 중구 은행동으로 옮긴 이유도 근처에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성심당 주변엔 상권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사업을 하려면 대전역에서 해야 했다.

임 전 회장의 ‘모험’이 성공한 것은 사람에 대한 투자 덕분이었다. 그는 동시대의 다른 운영자들과 달리 제빵사들을 끊임없이 교육시켰다. 윈도 베이커리인 성심당에서 94년 기능장 제도가 생긴 이래 기능장을 4명이나 배출한 것은 여기에 힘 입었을 터다. 이 공장장을 비롯해 십수 년이 넘는 장기 근속자도 많다. 임영진(55) 현 회장도 이런 아버지의 철학을 그대로 따른다.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의 <욥기> 8장 7절은 성심당의 역사와 잘 어울린다. 이 공장장에게 제빵 철학을 물었다. “빵집은 빵이 맛있어야 합니다.” 동어반복이 아니냐고 되묻자 그는 “케이크, 초콜릿도 중요하지만 빵집은 빵이 맛있어야 합니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이다.


|서울 나폴레옹 과자점 박기수 공장장|

소보로·크림빵 맛은 왜 중요한가

긴 세월 버티게 해 준 건 ‘기본’… 제빵계 장인들 거쳐간 산실

서울 나폴레옹 과자점 박기수 공장장
서울 나폴레옹 과자점 박기수 공장장
올해로 40년째인 서울 나폴레옹과자점의 양정인(51) 사장은 종종 상호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제과점 이름이 뭐 그리 거창하냐는 취지다. 68년 양 사장의 시아버지인 강인정 초대 사장이 채무 대신 성북구의 작은 카페를 넘겨받았다. 고민하던 강 전 사장은 빵집을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강 전 사장은 우리나라에서 갈수록 빵 수요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자 출신으로 지역신문사 부사장까지 지낸 그는 일본 저널리스트들과 친분이 있어 자주 일본을 왕래했다. 제과제빵 선진국이던 일본에서 그는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같은 해 ‘동경제과’란 상호로 업소 등록을 신청했다.

그러나 며칠 뒤 강 전 사장에게 날벼락 같은 ‘불허’ 통보가 날아들었다. 이름이 ‘왜색’이라는 것. 당시 중학교 2학년생이던 아들이 나폴레옹 위인전을 달고 살았다. ‘재수’ 끝에 강 전 사장은 ‘나폴레옹’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빵집을 열 수 있었다.

양 사장은 나폴레옹 과자점을 한국 제빵사들의 산실이라고 자부했다. 실제로 제빵계의 대표적인 ‘장인’인 김영모 기능장(김영모제과점 사장)과 권상범 리치몬드 과자점 사장 모두 나폴레옹 주방을 거쳐 갔다. 두 사람은 70년대 초반 나폴레옹 주방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단골에 얽힌 추억도 많다. “자랑 같습니다만, 지난해 말 청계천 복원 사업 때문에 수십 년 차지해 온 빵집 터에서 수십 미터 옆으로 신축했습니다. 공사 때문에 몇 달간 문을 닫았을 때 ‘빵 안 파냐’는 손님들의 전화가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도올 김용옥씨 등 유명인들도 종종 이곳을 찾아 잠시 빵집 안을 소란스럽게 만든다고 전했다. 양 사장은 올해가 윈도 베이커리에 고비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밀가루·기름 같은 재료 값은 오르는데 프랜차이즈 빵집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박기수 공장장의 원칙도 ‘기본’이었다. “윈도 베이커리가 고난을 헤쳐 갈 방법은 결국 맛이 아닐까요. 나폴레옹과자점의 기본 철학은 ‘기본에 충실하자’입니다. 저는 항상 소보로빵·크림빵 등 전통 메뉴인 ‘기본빵’ 맛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긴 세월을 버티게 해주었던 건 기본이었습니다.”


|서울 에이비시뉴욕제과 엄재식 차장|

반죽 치다 울면서 잠들던 그 시절

주방 막내로 시작해 40년 한길, 기념패 받을 때 다시 눈물이 …

서울 에이비시뉴욕제과 엄재식 차장
서울 에이비시뉴욕제과 엄재식 차장
1966년 겨울 명동이 기억납니다. 당시 뉴욕제과(현재 에이비시뉴욕제과) 주방 막내였던 저는 양손에 밥그릇과 반찬을 들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빵공장에서 길 하나 건넜을 뿐인데 왜 그리 길이 멀던지. 식당에서 주방 고참들이 먹을 점심밥을 받아 오는 게 주방 막내의 임무였습니다. 겨우 14살이던 저는 급한 마음에 발이 빨라졌습니다. 국이 식으면 안 되는데. 아차! 잠시 뒤 정신을 차린 저는 뒤엎어진 밥과 반찬을 바라보고 망연자실했습니다. 등에서 식은 땀이 났습니다. 허겁지겁 다시 밥을 받으러 갔습니다. 밥집 아가씨의 잔소리를 잔뜩 들어야 했습니다. 물론 “밥 타러 갔냐, 밥 지으러갔냐”는 고참들의 잔소리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뉴욕제과는 지금 강남역 자리가 아니라 명동에 있었습니다. 66년 명동 한진빌딩 앞에 있다가 73년께 지금 자리로 옮겼습니다. 73년엔 지하철도 빌딩도 없었습니다. 변변한 건물이라곤 국기원 하나였습니다. 빌딩은커녕 주변 콩밭, 미나리깡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지금의 강남역 부근에서 말죽거리(현재 양재역 부근)까지 허허벌판이었으니까요. 복개하기 전이라 뉴욕제과 앞에는 반포천이 흘렀습니다. 전 가끔 개천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60∼70년대엔 매일 새벽 5시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습니다. 한달에 쉬는 날은 단 하루였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부분 직장에서 다들 그렇게 일했습니다. 그게 버릇이 돼 지금도 한달에 이틀 이상 못 쉽니다. 막내 시절 일이 너무 고돼 반죽을 치다 작업대에 엎드려 울면서 잠들기 일쑤였습니다. 잘못 설탕 봉지를 뺨에 받치고 잠들었다간 다음날 아침 눈물에 젖은 설탕봉지 글자가 뺨에 묻었습니다. 그래도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은 뉴욕제과 빵이 아니면 안 먹었습니다. 전국에 지점이 80여 곳 있는 큰 체인이었습니다. 그러다 98년 지점을 정리하고 윈도 베이커리로 새출발합니다. 손병문(58) 에이비시상사 회장이 인수한 뒤 이름도 ‘에이비시 뉴욕제과’로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맛도 건물도 그대로입니다. 저도 40년 넘게 주방을 지키고 있습니다. 2006년 당시 회장님이 기념패를 줬을 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앞으로도 전 계속 주방을 지킬 겁니다.

정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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