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갠지스강에서 수 많은 인도인들이 물에 몸을 담그는 힌두교 정화의식에 참여했다. 아에프페연합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혈혈단신 인도 요리 연수 다녀온 이탈리아 요리사 박충준씨의 색다른 경험
혈혈단신 인도 요리 연수 다녀온 이탈리아 요리사 박충준씨의 색다른 경험
인도·네팔 음식점은 한국인으로 붐비지만 정작 인도 음식을 배우기는 쉽지 않다. 인도 요리를 가르치는 학원이나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인도 요리·여행 붐이 일기 훨씬 전 혈혈단신 요리 연수를 다녀온 ‘용감한’ 한국인 요리사가 있었다. 이탈리아 요리사 박충준(49)씨는 1994년에 체험한 인도 요리 연수를 행복하게 떠올렸다. 인도에 연수 갔을 때나 지금이나 박씨는 이탈리아 요리사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는 그때 인도 요리에 도전했던 경험이 요리사로서 긴장의 끈을 조일 수 있었던 자산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서울 광화문의 ‘스파게티가 있는 풍경’(02-338-8611)을 운영한다. 박씨에게서 요절복통 인도 요리 연수 체험을 들어봤다.
1994년 4월 뭄바이(봄베이) 공항에 내려서자 뜨거운 공기가 박충준 요리사의 얼굴을 덮었다. 밤이었지만 열대의 공기는 더웠다. 박씨는 81년 신라호텔에 입사한 베테랑 이탈리아 요리사였다. 10여년이 지난 94년 베테랑으로 인정받았지만 ‘자극’이 필요했다. 다른 요리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때마침 당시 신라호텔의 스위스인 총지배인이 양식당에서 인도 요리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한 달간의 인도 요리 연수를 제안받은 박씨는 주저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도에 대해서 아는 건 간디와 카스트 제도뿐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 박씨를 도리어 설레게 했다. 당시 서울―뭄바이 직항 노선이 없어 박씨가 탄 비행기는 타이를 경유해야 했다. 9시간의 비행으로 녹초가 된 박씨는 숙소에 짐을 부리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요리사들은 바이샤 계급에서만 배출
다음날부터 인도인이 경영하는 특급호텔인 타지마할 호텔 주방에서 교육이 시작됐다. 박씨와 그의 신라호텔 동료 요리사 외에 다른 나라 요리사는 없었다. 20여명의 요리사 전부가 인도인이었다. 박씨의 ‘사수’로 총주방장 밑의 중간급 요리사가 배정됐다. 박씨는 당시 자신의 ‘사수’였던 ‘샴’과 ‘삭티’라는 이름을 정확히 기억했다. 둘 다 나이가 어렸지만 박씨는 이들이 가르치는 대로 난 만드는 일부터 배워나갔다.
난을 탄두리에서 굽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탄두리는 진흙으로 빚은 인도의 전통 화덕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아궁이 구실을 한다. 이 화덕에서 난도 만들고 고기를 꼬챙이 꿰어 굽는 닭고기 요리(탄두리 치킨)도 만들 수 있다.
난 굽기의 핵심은 ‘속도’였다. 뜨거운 탄두리 안에 몇 초 동안 팔을 쑥 집어넣어 난 반죽을 탄두리 안쪽 벽에 찰싹 붙도록 던지는 것이 요령이다. 탄두리의 뜨거운 열기에 놀라 박씨는 번번이 난 반죽을 떨어드렸다. 그때마다 샴과 삭티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것들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실패한 난은 만든 사람이 먹어야 했다. 난 반죽을 숙성시킬 때 시간과 온도를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박씨는 한 달간 주로 탄두리 요리를 배웠다. 보통의 탄두리 치킨은 물론 ‘치킨 디카’라는 흰색 탄두리 치킨 요리도 익혔다. 케밥 요리도 배웠다. 인도 요리와 이탈리아 요리의 차이점을 배운 것은, 이탈리아 요리사로서 소중한 학습이 됐다. 이탈리아 요리도 향신료를 쓰지만 두 종류 이상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 요리에는 향신료가 아주 많이 쓰였다. 더운 기후 때문에 방부제 구실을 하는 향신료가 많이 쓰인다는 사실을 박씨는 뒤늦게 깨달았다. 인도인 요리사들은 식사 때 한사코 숟가락을 두고 손으로 밥을 먹었다. 그들은 박씨에게도 “손으로 밥을 먹으라”고 권유했다. 박씨는 말로만 듣던 카스트 제도를 실제로 지켜봤다. 요리사들은 전부 평민인 바이샤 계급에서 배출됐다. 브라만이나 천민인 수드라는 요리사가 될 수 없었다. 2주쯤 지나자 샴과 삭티, 박씨는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그들이 한사코 안 가르쳐주는 요리 ‘비기’가 있었다. 인도인들에게 요구르트는 한국인에게 된장이나 간장 같은 존재였다. 박씨가 요구르트 제조법을 가르쳐 달라고 할 때마다 “내일 배우자”는 말이 돌아왔다. 이런 실랑이가 서너 번 반복되자 박씨도 깜빡 잊고 말았다. 연수가 끝나기 이틀 전에야 박씨는 요구르트 제조법을 배우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박씨가 집요하게 조르자 그제야 샴과 삭티가 제조법을 일러줬다. 우유를 발효시키는 미묘한 시간과 온도가 ‘비법’이었다.
인도 요쿠르트 제조의 비법을 배우다
박씨는 14년이 흘렀지만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뭄바이 꼬마들의 눈망울을 잊지 못했다. 엘리펀트 섬에서 자신의 모자를 훔쳐 가던 원숭이도. 박씨는 “연수 뒤 잠시 동안 탄두리 치킨, 난, 커리 등 기본적인 인도 음식을 요리했다”며 “인도에서 신라호텔로 탄두리를 직접 공수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는 인도 요리·여행 붐이 일기 전이어서 뭄바이에 머무르며 한국인을 한 명도 못 봤다”고 덧붙였다. 그는 인도 요리 연수가 요리사로서 신선한 자극이 됐다고 말했다. 언젠가 다시 인도 땅을 밟고 싶다며 그는 웃으며 말했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난 굽기의 핵심은 ‘속도’였다. 뜨거운 탄두리 안에 몇 초 동안 팔을 쑥 집어넣어 난 반죽을 탄두리 안쪽 벽에 찰싹 붙도록 던지는 것이 요령이다. 탄두리의 뜨거운 열기에 놀라 박씨는 번번이 난 반죽을 떨어드렸다. 그때마다 샴과 삭티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것들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실패한 난은 만든 사람이 먹어야 했다. 난 반죽을 숙성시킬 때 시간과 온도를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박씨는 한 달간 주로 탄두리 요리를 배웠다. 보통의 탄두리 치킨은 물론 ‘치킨 디카’라는 흰색 탄두리 치킨 요리도 익혔다. 케밥 요리도 배웠다. 인도 요리와 이탈리아 요리의 차이점을 배운 것은, 이탈리아 요리사로서 소중한 학습이 됐다. 이탈리아 요리도 향신료를 쓰지만 두 종류 이상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 요리에는 향신료가 아주 많이 쓰였다. 더운 기후 때문에 방부제 구실을 하는 향신료가 많이 쓰인다는 사실을 박씨는 뒤늦게 깨달았다. 인도인 요리사들은 식사 때 한사코 숟가락을 두고 손으로 밥을 먹었다. 그들은 박씨에게도 “손으로 밥을 먹으라”고 권유했다. 박씨는 말로만 듣던 카스트 제도를 실제로 지켜봤다. 요리사들은 전부 평민인 바이샤 계급에서 배출됐다. 브라만이나 천민인 수드라는 요리사가 될 수 없었다. 2주쯤 지나자 샴과 삭티, 박씨는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그들이 한사코 안 가르쳐주는 요리 ‘비기’가 있었다. 인도인들에게 요구르트는 한국인에게 된장이나 간장 같은 존재였다. 박씨가 요구르트 제조법을 가르쳐 달라고 할 때마다 “내일 배우자”는 말이 돌아왔다. 이런 실랑이가 서너 번 반복되자 박씨도 깜빡 잊고 말았다. 연수가 끝나기 이틀 전에야 박씨는 요구르트 제조법을 배우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박씨가 집요하게 조르자 그제야 샴과 삭티가 제조법을 일러줬다. 우유를 발효시키는 미묘한 시간과 온도가 ‘비법’이었다.

박충준 요리사는 탄두리(화덕)에서 요리하는 데 가장 어려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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