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제 그거 봤어?
[매거진 Esc]너 어제 그거 봤어?
드라마에서 바뀌는 결혼과 연애·가족상
〈명랑 히어로〉에선 김구라 제대로 먹히네 몇 년 전만 해도 드라마에서 연애는 넘쳐났지만 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혈기 방장한 커플이 여행을 가도 손만 꼭 잡고 자고, 하다못해 동거를 하는 상황이 와도 각 방 원칙은 깨지지 않았다. 연예인들의 ‘속도 위반’ 결혼은 꼭꼭 숨겨졌다가 연예정보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겸연쩍게 웃으며 때이른 출산 소식을 전할 때 비로소 알려졌다. 요즘은 상황이 바뀌었다. 배우 이한위와 개그맨 이수근의 혼전 임신도 결혼 소식 못지않게 즐거운 뉴스로 보도됐고, 한국방송의 <엄마가 뿔났다>에서 아들의 ‘사고’를 심난해했던 건 한자(김혜자)뿐이다. 혼전 임신을 상상하기 힘든 시절 결혼해 20대 딸을 키우는 엄마 정석희(칼럼니스트·사진 오른쪽)씨와 연애와 성에 개방적인 30대 독신 남성인 조진국 작가가 새로 시작한 에스비에스 월화 드라마 <사랑해>와 함께 방송에서 바뀌는 연애와 결혼, 가족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또 오락 프로그램에 시사적인 주제를 곁들여 참신한 재미를 선사하는 문화방송의 <명랑 히어로>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정석희 <사랑해>의 첫 내레이션이 이거다. “그날 밤 그 아이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14살 많은 남자와 스무 살의 여자가 우연찮게 혼전 임신을 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에 이르는 이야기다. 혼전 임신이라는 소재가 옛날 같으면 결코 가벼울 수 없는데 이 드라마는 밝고 경쾌하다. 조진국 오히려 상큼한 연애 만화를 보는 느낌이다. 혼전 임신이라는 소재만 보면 자극적인 설정인데, 풀어가는 방식이 경쾌해서인지 자극적이기보다 잔잔하고 아기자기하다고 할까. 결국 ‘결혼’으로 봉합하고 마는가
정 혼전 임신뿐인가. 이 드라마의 주제어들을 보면 변태, 불륜, 룸싸롱 이런 어두운 단어들이 즐비하지 않나.(웃음) 접근 방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세상이 그만큼 바뀌었다는 의미겠지. 나 결혼할 때만 해도 혼전 임신은 철저히 숨기거나 비밀스럽게 처리하거나 해야 하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는데 말이다. 조 세대 차이도 있겠지만 문화적인 차이도 있는 것 같다. 우리 누나도 혼전 임신을 하고 결혼했는데 사실 우리 집에서는 그걸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둘이 사랑하는 사이였으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결혼의 지름길이 된 셈이다. 정 <사랑해>가 특별한 게 아니라 <엄마가 뿔났다>를 봐도 아주 평범한 집의 아들은 애 낳아 와서 결혼하고, 딸은 이혼남과 동거하다시피하는데 그걸 굉장히 일상적으로 그리지 않나. 따지고 보면 한국방송의 <싱글 파파는 열애중>이나 <아빠 셋 엄마 하나>도 통상적인 연애나 가족 이야기가 아니다. 조 옛날에는 나보다 내 주변 사람, 내 시선보다 남이 나를 보는 시선을 중심으로 관계가 구성됐다면 지금은 철저히 너와 나의 이야기로 바뀐 것 같다. 또 연애뿐 아니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개인의 선택이 된 거지. 그게 드라마나 방송에도 반영이 된 거고.
정 그런데 혼전 임신을 결혼으로 연결시키는 게 과연 개인의 자유의지라고 볼 수 있을까.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떠밀려서 결혼을 해야 한다면 그게 더 불행한 거 아닐까. <사랑해>에서도 결혼을 원하지 않던 철수(안재욱)가 스트레스로 결혼식장에서 기절한다고 하던데. <막돼먹은 영애씨>에서도 영채가 혼전 임신으로 결혼을 하는데 유산이 되면서 결혼의 매개가 사라지니까 결혼이 무색해지지 않나.
조 이전보다 진화된 개방성과 여전히 남은 보수성이 혼재된 양상인 것 같다. 혼전 임신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개방된 시각을 가지면서도 결국 결혼으로 봉합을 해야 하는 거다. 주인공 신은경이 싱글맘을 선택하는 파격적 설정의 <불량 커플>도 결국 아름다운 결혼이라는 보수적인 뒷수습을 하지 않았나.
정 나같이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좀 헷갈린다.(웃음) <엄마가 뿔났다>나 <사랑해>를 보면서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러고 ‘우리 결혼했어요’를 보면서 살아보고 결혼하는 것도 괜찮겠구나 싶다가도 만약에 내 딸이 혼전 동거를 한다거나 며느리 될 아이의 혼전 임신 사실을 알았다고 하면 글쎄, 드라마에서 배운 것만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 없는데 …, 나는.(웃음) 또 현실은 실제 우연히 혼전 임신을 한다고 하면 골치 아프게 풀리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너무 대수롭지 않게 풀고 가니까 긍정적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만화적 재치가 돋보이는 〈사랑해〉
조 원치 않거나 강제된 임신 같은 걸 부각시키면 그건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 되는 거니까 티브이가 거기까지는 보여주기 싫은 거다. 그래도 나는 <사랑해>의 장점이 이런 소재를 만화적으로 풀어가는 재치로 보인다. 이를테면 철수와 영희가 넘어질 때 꽃비가 떨어지는 컴퓨터그래픽 장면 같은 게 애니메이션 같으면서도 사랑스럽다. 몇 가지 디테일의 부족은 아쉽지만. 전혀 다른 프로그램이지만 <명랑 히어로>에서도 캐릭터를 만화처럼 재치있게 활용해 프로그램 분위기를 잘 살렸다.
정 <명랑 히어로>는 재미있는 기획이다. 살면서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고 화나는 것들, 짜증 나는 것들 많지 않나. 얼마 전 아들이 군대 가니까 연예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질질 끌다가 다들 공익으로 가는 거야, 싶었는데 이처럼 세상에 태클 걸고 싶은 일들을 오락 프로그램의 소재로 끌어왔다는 게 참신하다.
조 딱딱한 시사 프로그램이 아니면서 평범한 시청자들의 답답하고 힘든 사정을 연예인들이 시청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게 좋았다. 김구라의 독설은 불편하고 거슬리는 적도 많았는데 여기서 진짜 제대로 된 멍석을 깐 것 같다.
정 그런데 이야기 주제를 출연진들이 공감하기 힘든 이슈들, 대학 등록금 문제나 환율 문제 등으로 잡으니까 겉도는 느낌도 있다. 주제에 대한 지식이 많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출연진들이 체감을 못하는 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 김국진 이혼, 이하늘 신용불량, 신정환 도박으로만 자꾸 빠지는 건 옥에 티다.
조 라디오 스타에서 맨날 들었던 이야기잖아.(웃음) 사실 기본적으로 오락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큰 걸 기대하는 건 아니다. 재미있고, 속이 후련해지는 통쾌함을 선사하면 된다. 출연진들이 관련 주제에 대해서 지식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지만 자기 의견을 좀더 명쾌하게 정리해줘야 이 프로그램만의 색깔이 더 뚜렷해질 것 같다.
정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는 대담과 <명랑 히어로>는 비슷하다. 우리는 한 주 동안 텔레비전을 보고, 그 팀은 한 주의 뉴스를 보고 태클을 걸게 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티브이를 안 보고 이야기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누가 오려준 신문만 더듬더듬 읽으면 밥상 위에 올려진 숟가락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꼴이다. 예습을 안 해 온 출연진에게는 <상상플러스>의 뿅망치 같은 벌이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지각생 박미선, 좀 일찍일찍 나와라
조 우리가 매주 최고, 최악을 뽑는 것처럼 거기도 이주의 명랑 히어로뿐 아니라 안티 히어로를 뽑으면 어떨까. 사실 누군가를 칭찬하는 건 쉽지만 질타하고 비판하는 거야말로 어려운 일 아닌가. 기왕 시청자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려면 나쁜 사람도 꾸짖어줬으면 좋겠다.
정 그러려면 출연진들이 더 대범해질 필요가 있다. 쥐머리 사건으로 과자 회사가 이럴 수 있냐고 시작했다가 시에프 때문에 욕 못 한다고 농담을 했는데, 이게 사실은 농담 속의 진담이다.
조 맞다. 좀더 용감해졌으면 좋겠다. 시청자가 여기서만 허용해줄 테니까 모든 출연진이 김구라가 되기를 바란다.
정 사족인데 박미선이 2회 동안 계속 늦게 등장했는데 설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부터는 제 시간에 나와주셨으면 좋겠다. 홍일점인데 자꾸 그러면 여자라서 트미한 것처럼 보이잖아.(웃음)
정리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명랑 히어로〉에선 김구라 제대로 먹히네 몇 년 전만 해도 드라마에서 연애는 넘쳐났지만 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혈기 방장한 커플이 여행을 가도 손만 꼭 잡고 자고, 하다못해 동거를 하는 상황이 와도 각 방 원칙은 깨지지 않았다. 연예인들의 ‘속도 위반’ 결혼은 꼭꼭 숨겨졌다가 연예정보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겸연쩍게 웃으며 때이른 출산 소식을 전할 때 비로소 알려졌다. 요즘은 상황이 바뀌었다. 배우 이한위와 개그맨 이수근의 혼전 임신도 결혼 소식 못지않게 즐거운 뉴스로 보도됐고, 한국방송의 <엄마가 뿔났다>에서 아들의 ‘사고’를 심난해했던 건 한자(김혜자)뿐이다. 혼전 임신을 상상하기 힘든 시절 결혼해 20대 딸을 키우는 엄마 정석희(칼럼니스트·사진 오른쪽)씨와 연애와 성에 개방적인 30대 독신 남성인 조진국 작가가 새로 시작한 에스비에스 월화 드라마 <사랑해>와 함께 방송에서 바뀌는 연애와 결혼, 가족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또 오락 프로그램에 시사적인 주제를 곁들여 참신한 재미를 선사하는 문화방송의 <명랑 히어로>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정석희 <사랑해>의 첫 내레이션이 이거다. “그날 밤 그 아이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14살 많은 남자와 스무 살의 여자가 우연찮게 혼전 임신을 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에 이르는 이야기다. 혼전 임신이라는 소재가 옛날 같으면 결코 가벼울 수 없는데 이 드라마는 밝고 경쾌하다. 조진국 오히려 상큼한 연애 만화를 보는 느낌이다. 혼전 임신이라는 소재만 보면 자극적인 설정인데, 풀어가는 방식이 경쾌해서인지 자극적이기보다 잔잔하고 아기자기하다고 할까. 결국 ‘결혼’으로 봉합하고 마는가
정 혼전 임신뿐인가. 이 드라마의 주제어들을 보면 변태, 불륜, 룸싸롱 이런 어두운 단어들이 즐비하지 않나.(웃음) 접근 방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세상이 그만큼 바뀌었다는 의미겠지. 나 결혼할 때만 해도 혼전 임신은 철저히 숨기거나 비밀스럽게 처리하거나 해야 하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는데 말이다. 조 세대 차이도 있겠지만 문화적인 차이도 있는 것 같다. 우리 누나도 혼전 임신을 하고 결혼했는데 사실 우리 집에서는 그걸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둘이 사랑하는 사이였으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결혼의 지름길이 된 셈이다. 정 <사랑해>가 특별한 게 아니라 <엄마가 뿔났다>를 봐도 아주 평범한 집의 아들은 애 낳아 와서 결혼하고, 딸은 이혼남과 동거하다시피하는데 그걸 굉장히 일상적으로 그리지 않나. 따지고 보면 한국방송의 <싱글 파파는 열애중>이나 <아빠 셋 엄마 하나>도 통상적인 연애나 가족 이야기가 아니다. 조 옛날에는 나보다 내 주변 사람, 내 시선보다 남이 나를 보는 시선을 중심으로 관계가 구성됐다면 지금은 철저히 너와 나의 이야기로 바뀐 것 같다. 또 연애뿐 아니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개인의 선택이 된 거지. 그게 드라마나 방송에도 반영이 된 거고.

오락 프로그램에 시사적 주제를 접목시켜 기대를 모으는 문화방송 〈명랑 히어로〉. 문화방송제공.

혼전임신을 만화적 경쾌함으로 다루는 에스비에스 드라마 〈사랑해〉. 에스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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