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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백우현 공장장과 맥주의 시대 ①
25년간 맥주만 빚은 사나이, 맥주에 울고 웃은 이야기를 빚어드립니다
와인은 최근 취하는 술 문화보다 음미하는 술 문화를 선호하는 한국인들에게 ‘교양’처럼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은 특히 와인의 서로 다른 개성에 열광한다. 와인마다 지닌 태생의 비밀과 역사 역시 술 맛만큼이나 술자리를 풍요롭게 만든다. 그러나 맥주가 사람이라면 “내가 와인보다 못한 게 뭐야?”라고 반문할 것 같다. 맥주의 오랜 역사와 개성은 와인 못지않다. 만들고 마시는 사람들의 인생도 녹아 있다. 이 땅에 맥주가 들어온 지 70년이 더 지난 지금, 맥주는 이제 ‘우리 술’이라 부를 만큼 일상의 일부가 됐다. 그래서 최근의 하우스맥주 열풍은 외려 늦은 감마저 든다. 백우현(50) 오비맥주 광주공장장은 오비맥주를 첫 직장으로 20대 중반부터 25년 동안 오로지 맥주만 빚어왔다. 〈Esc〉가 그에게 한국 맥주의 맛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빚어 달라고 부탁했다. 여전히 특정 맥주회사에 근무하고 있지만, 그의 추억과 경험이 보편적이라고 판단했다. 이제 시원한 맥주 이야기가 발효되기 시작한다.
오늘 인터뷰를 위해 광주 공장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에서 맥주를 만들기 시작한 뒤 처음으로 지난 25년을 돌아봤습니다. 저는 정확히 25살 되던 1983년 6월7일에 입사했습니다. 여전히 입사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합니다. 올해 쉰살이니까 반평생은 부모와 보내고 나머지 반평생은 맥주와 함께 보낸 셈입니다.
술고래라 맥주회사 취직에 성공했을까
저는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습니다만, 정작 학교에선 맥주 만드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막걸리를 만드는 실습뿐이었습니다. 당시엔 한국 대학에서 맥주 양조를 가르칠 학자가 없었습니다. 맥주 시장 자체도 너무 작았지요. 단적으로 막걸리는 양조장도 많지만 맥주 회사는 겨우 두 곳밖에 없었습니다. 맥주 회사가 몇 개 없는데 맥주 만드는 법을 뭐하러 가르치겠습니까.
대학 시절 주로 마셨던 술도 막걸리입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은 강북에 있었는데, 막걸리를 많이 마시기로 유명했습니다. 게다가 76학번인 제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암울한 군사독재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이념과 무관한 적십자 서클 활동을 했지만, 다른 모든 서클처럼 선후배들과 시국을 안주 삼아 ‘다라’(대야)에 담은 막걸리를 밤새 퍼마시던 게 일이었습니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당시 저는 다른 가족들과 달리 주량이 무제한에 가까웠습니다.
이런 저의 술 사랑 덕분인지 함께 면접을 봤던 77학번 후배들을 제치고 회사는 저를 선택했습니다. 학점도 제가 더 낮았는데 말입니다. 제가 막 입사했을 땐 맥주 시장이 막 커지던 시점이었습니다. 70년대 후반의 중동 건설 붐도 한몫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맥주는 비싼 술이었습니다. 생맥주가 막 대중들에게 보편화되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당시 생맥주 한잔에 5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회사에 들어가 처음 받은 월급이 30만원에 채 못 미치던 시절입니다. 당시 대중화되기 시작한 생맥줏집에서 사람들은 벽을 따라 놓여진 테이블에 앉아 땅콩과 김 몇 장이 나오는 100원짜리 안주에 생맥주를 마셨습니다. 그조차도 비싸서 대학생들은 언감생심 꿈꾸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이 많이 마시던 막걸리는 4홉(약 720㎖)들이 맥주병에 담겨 팔렸습니다. 막걸리 1병에 100원이었습니다. 그러니 저처럼 돈 없는데 주량이 센 학생들은 맥주를 못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이야 맥주 주세가 소주와 같은 72%지만 당시엔 맥주 주세가 200%에 달했습니다. 당시 맥주는 골프와 같은 고급품으로 인식돼 종가세를 기준으로 라벨은 물론 병뚜껑에도 세금을 매겼습니다. 병맥주는 생맥주보다 더 비쌌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70년대에 생맥주와 통기타가 대학생의 상징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김민기씨나 양희은씨의 노래가 대중적이어서 청춘의 상징이 됐을 뿐, 라이브 음악을 하는 식당에서 대학생이 생맥주를 마신다는 건 꿈꾸기 어려웠습니다. 벼르고 별러 과외비 타는 날에야 겨우 벌벌 떨며 한두 잔 사먹을 뿐이었습니다.
라벨은 물론 병뚜껑에도 세금을 매기다
이런 이유로 저는 대학 시절 병맥주는 물론 생맥주도 거의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손목시계와 전자계산기가 한 달에 몇 차례씩 전당포에 들락날락하는 마당에 맥주를 마시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입사한 뒤 2주 동안 부서에서 일은 시키지 않고 거의 매일 생맥주를 먹이던 기억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바람에 비슷한 시기에 입사 지원을 했던 아이스크림 회사에는 면접조차 못 봤지만요. 덕분에 맥주 회사 식구가 된 건 다행입니다.
대학 시절엔 야간 통행금지에 걸릴까봐 툭하면 술 마시다 말고 버스를 잡아타러 뛰어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입사 직전인 82년 통행금지가 해제돼 편하게 술 마신 기억도 떠오릅니다. 양조공장에 배치된 저는 점점 맥주에 울고 웃는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오비맥주 광주공장장
정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맥주가 이땅에 들어온지도 70년이 넘었다. 백우현 공장장은 25년 동안 맥주를 빚어온 한국 맥주의 산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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