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의 매운 맛은 한국의 맛이다. 사진 류우종 기자.
[매거진 esc] 농심과 함께 하는 라면 공모전‘삶은 라면’의 추억
세월에 묻어둔 추억이라고 하기엔 아직 새파란 엊그제 얘기지만 작년 한해를 미국에서 지낸 우리 가족에게 미국에서의 삶은 라면을 빼놓고 말하면 2% 부족한 체험기가 돼버린다.
내 나라를 처음 떠나본 우리에게 피부에 제일 먼저 다가온 이국살이의 고충은 음식이었다. 우리는 미국 동남부의 작은 소도시에서 살았는데 집에서 꽤 떨어진 한국 음식점을 찾지 않는 한 집 밖에서 한국 음식을 먹기란 언감생심 쉽지 않았다. 미국 땅에 처음 들어섰을 때 그 많은 즉석음식점에 놀랐고, 피자와 햄버거와 지나치게 단 디저트를 입에 달고 살며 병적으로 비만해진 미국인들에게 또 놀랐다.
대학이 일터인 남편은 구내식당에서 파는 빵과 고기류를 점심으로 먹고 나면 늘 속이 편치 않다 해서 김치와 밥이 든 도시락을 종종 싸다니곤 했다. 시큼하게 발효된 김치 냄새를 안 풍기려고 주로 야외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었는데 그때 뜨거운 국물을 부은 컵라면이 곁들여지면 남편의 뱃속은 그리 편안하고 행복할 수가 없었단다.
햄버거나 피자, 콜라 따위로 끼니를 때우고 집에 돌아온 날이면 이구동성으로 터져나오는 말, “와 ~, 김치 풀어서 얼큰한 라면 끓여 먹자!”. 즉석에서 쉽게 끓일 수 있는 김치라면은 따끈하고 얼큰한 국물이 늘 그리운 미국 생활에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밥상의 구세주였다. “카, 이제야 좀 살겠네.” 매콤하고 뜨거운 김치라면에 찬밥을 한 덩이씩 말아서 후룩 비우고 나면 빵 쪼가리로 더부룩해진 속이 편안해지면서 우리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그러니 김치와 라면 없는 이국 생활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장거리 여행 도중 휴게실(화장실)에서 컵라면 물을 끓이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풍경이다. 우리에게 무선 주전자와 컵라면은 장기 여행의 필수품이었다. 광활한 미국 땅에서 장거리 여행을 시작하면 하루에 적어도 8시간 이상씩 그것도 며칠 연속으로 차를 몰아야 할 때가 많다. 게다가 가도 가도 끝없는 아스팔트 도로와 양옆의 나무들 외엔 볼거리가 없는 고속도로 주변의 단조로움 탓에 여행은 쉬 피로를 몰고온다. 이때 우리는 출출해진 배도 채울 겸 지루한 여행길도 달랠 겸 비장의 컵라면을 꺼냈다.
미국의 고속도로 휴게실은 우리나라와는 무척 다르다. 한참을 달려서야 겨우 나타난 휴게실에는 맛있는 음식 냄새와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기대했던 우리를 비웃듯 썰렁한 화장실과 자판기 두어 대가 전부다. 간혹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서 각자 가져온 햄버거를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눈에 띌 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휴게소 화장실 어디나 플러그를 꼽을 수 있게 콘센트가 마련돼 있었고 우리는 무선 주전자에 물을 팔팔 끓여 컵라면을 먹을 수 있었다. 찬밥과 김치와 김을 라면과 함께 펼쳐놓으면 피자 몇 판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신토불이 식사가 시작된다. 한번은 백인 할머니가 화장실에서 뜨거운 물을 끓이는 우리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시며 말을 걸었다. 자기들은 여행 도중에 라면 먹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는데 장거리 여행에 정말 좋은 아이디어 같다면서 자기도 당장 무선 주전자를 하나 장만해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미국 슈퍼에 즐비한 일본 라면은 비싸고 맛은 한국 라면보다 덜하다며 한국 라면을 적극 추천했다. 아, 한국 라면 전도사라도 된 기분이란.
아무튼 너를 알면 나를 다시 알게 되는 법. 한국에 돌아와 나는 새삼스레 두 가지 사실에 감탄했다. 먼저, 우리의 강산이 이렇게 아름다웠단 말인가. 고속도로 주변으로 아기자기하게 펼쳐지는 다양한 풍경에 여행의 재미는 배가 되었다. 도로 주변을 에워싼 겹겹의 높고 낮은 산들, 작고 아담한 마을과 정겨운 사람들, 구불거리는 강물 사이로 이어지는 논과 밭, 그렇게 단조롭고 밋밋한 미국의 고속도로 여행과 어찌나 비교가 되던지 ….
그리고 채소와 곡류 중심으로 짜인 우리의 식탁에서 비만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조상의 빛나는 지혜를 보았다. 육류와 단것을 많이 섭취하는 미국인들에게 오늘날 당뇨병과 비만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다. 국민에게 촛불을 들게 한 광우병 문제도 육류 중심의 서구식 식탁에 한 가닥 뿌리가 닿아 있다. 그러니 건강한 식단에 깊은 맛까지 추구하는 우리의 수준 높은 음식 문화에 어찌 자부심이 생기지 않겠는가.
정은주 서울 노원구 중계동
정은주 서울 노원구 중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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