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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어리광 어찌하오리까?

등록 2009-01-07 19:54수정 2009-01-12 11:32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30대 기혼 직장여성입니다.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에서 인정받으며 일하는 커리어우먼이지요. 제 고민은 그 흔한 고부갈등 문제입니다. 어머니와 누나만 있는 가족의 유일한 남자였던 남편은 그 집안의 슈퍼히어로였습니다. 남편과 저는 많이 사랑하면서 연애를 했지만, 홀로된 시어머니는 아들이 여자에 빠져 시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니 신혼은 남편 쟁취 투쟁이었습니다. 남편은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커져 어머니의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전 못 참고 이혼까지 선언했지만, 남편이 적절히 처신해준 덕에 다시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첫아이를 임신했고, 저도 이때부턴 노력했습니다. 아시겠지만 회사 다니면서 육아하다 보면 주말에 하루쯤은 정말 쉬고 싶습니다. 하지만 내 한 몸 희생해서 손주 보여드리기 위해 매주 시댁을 방문했습니다. 평소에도 “어른 말이 법이다”라는 말을 늘 하시고, 제 아이 입고 먹는 것까지 끊임없이 간섭하시는 통에 고역이지만요. 그러던 중 몇 달 전에는 회사일이 바빠 시댁에 자주 못 가고 김장도 못 도와드렸는데요, 시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화내십니다. 시누이들이 김장 다 해주고 갔다면서요. 시누이들은 전업주부이며 경제적으로 시어머니께 의존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에 육아까지 너무 힘든데, 종종 술을 드시고 전화해 자신을 안 챙겨줘 서럽다며 하소연하시는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지옥입니다.

A 의무방어식 효도는 과감하게 청산하세요. 더불어 시댁 욕도 그만 끝내시고요

고부갈등은 가부장제와 ‘효’ 이데올로기가 결탁한 음모입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에선 여자들은 남자와의 관계성으로 그 지위가 정해지는데요, 시어머니(어머니)는 며느리(아내)를 하위 존재, ‘꼬붕’쯤으로 생각하지요. 시어머니는 ‘권력자’인 가부장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나중에 온전히 ‘어머니’라는 영예로운 타이틀만 남을 때까지 참고 참았다가 ‘며느리’라는 이름의 후배에게 가시면류관을 물려주고 당신은 이제 그 권력자 옆에서 방석 깔고 누우시려 합니다. 그리고 며느리의 대접을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남자를 개뿔 권력으로 안 쳐주는 잘난 우리 ‘커리어우먼’ 세대들은 그 가시면류관을 왜 내가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 능력으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데 왜 시어머니는 나를 ‘내 잘난 아들 덕에 먹고사는 여자’로 간주하고 그 잘난 아들 키워준 대가를 나보고 보답하라는 건지 당최 이해가 안 되는 거지요. ‘그러려니’ 하고 ‘예스 우먼’이 되기에는 육체적으로 힘들고, 인격적으로 무시받는 느낌입니다. 이윽고 가부장들이 팔짱 끼며 지켜보는 가운데 여자들끼리의 작은 전쟁이 시작됩니다. 가부장들은 문제의 본질이 자기들의 특권누림 때문인지도 모른 채, “정말 여자들끼리 왜 이러냐?” “당신, 우리 엄마랑 잘 좀 지내봐” 이러면서 ‘효’의 정신으로 네가 좀 참으라고 윽박지릅니다. 네 부모에겐 자식인 너부터나 잘하라고 해주십시오.

그렇습니다. 며느리는 자식이 아닙니다. ‘며느리를 친딸처럼’ 이 말 역시도 ‘모유 수유는 두 돌 때까지’처럼 여자를 ‘잡는’ 이 사회의 음모입니다. 며느리를 친딸 대하듯 하라고 시어머니께 주문하는 건 무리이고 그 반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나를 친딸처럼 안 대해 주고 남편, 시누이들과 나를 차별 대우한다 해도 서운해할 일도 아닙니다. 우린 자식이 아니라 자식의 배우자니까요. 사실 현실 속의, 그리고 브라운관 속의 며느리도 ‘딸’보다는 아무리 봐도 ‘파출부’라는 이름이 더 어울립디다. 아, 정말이지 고부갈등을 필수적 엔터테인먼트 요소로서 점점 자극적으로 티브이 드라마에서 그리는 것, 이것 또한 음모입니다. 고부갈등을 당연시하거나 심화시키는 이런 ‘쇼’들이야말로 심의에 안 걸리고 뭐하나 모르겠습니다.


우리, 이 음모들에 놀아나지 맙시다. 고부갈등은 무의미하고 하등의 스트레스 받을 가치가 없는 소모적인 감정 노동입니다. 무리하거나 희생하는 것은 그 누구를 위한 것도 못 됩니다. 마음에선 원치 않는데 왠지 며느리니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세요. 무거운 마음으로 의무방어식 시댁 방문은 관두고, 전화로 징징대시면 잠시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대고 전자우편 점검이나 하세요. 아이 문제로 참견하시면 앞에서 ‘네’라고 대답하고 뒤에선 내 아이 내 마음대로 하세요. 구태의연한 횟수 채우기 안부전화 같은 건 차라리 하지도 마세요. 김장요? 시누이들이 버무린 김치는 강제 징집 노동이 아니라서 훨씬 맛있게 익고 있을 겁니다. 싸가지 없는 며느리 될 각오 단단히 하고 그동안 며느리의 ‘도리’라고 생각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해왔던 모든 행위를 청산해 버리십시오. 그래서 시어머니의 과다 책정된 기대치를 한없이 낮추는 한편, 내 마음속의 부조리한 분노와 뒤끝을 없애고 제로 베이스부터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대물림된 억지 며느리 역할놀이는 이제 그만. ‘시’자라서 굴복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인간적인 장점을 발견하고 그를 예우할 수 있도록.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대신 우리끼리 약속할 게 있습니다.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시어머니를 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고부갈등이 일반화된 만큼 시댁 욕하는 것 역시도 흔한데, 욕이란 것은 자고로 하면 할수록 확대재생산되어 그 대상을 필요 이상으로 더 미워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며느리들끼리 온·오프라인으로 모여 시댁 욕을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것 또한 ‘엔터테인먼트’로 코믹하게 변질되는데, 이 갈등 관계가 고통을 넘어 이렇게 ‘묘한 쾌감’을 계속 주다 보면 이 땅에서 근절되기 힘드니까요. 개인적으로, 직면해서, 우리 세대에서, 제발 끝내 버립시다.

임경선 칼럼니스트(8년차 며느리)

※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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