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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내는 짠순이 친구에게 너무 화나요

등록 2009-02-04 18:38수정 2009-02-08 10:26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저는 35살의 직장 다니는 여성인데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닌 약 22년간 절친한 친구로 지내온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초·중·고 때는 물론 대학 때도 학생회장을 맡은 이 친구의 치명적인 문제는 돈을 절대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나서 제가 열 번 정도 돈을 내면 그녀가 한 번 정도 쓰는 정도입니다. 초등학교 땐 이 친구가 워낙 가난하고 제가 상대적으로 부유한 편이라 제가 내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고요, 대학 때 그녀의 형편도 나아졌지만, 워낙 돈 안 내는 게 몸에 배서 제가 냈어요. 하지만 친구는 약대를 졸업해서 약사가 되어 이젠 저보다 더 고소득자가 되고, 심지어 의사랑 결혼해서 의사 사모님이 되었지만 여전히 돈을 전혀 안 쓰니 불편합니다. 저번에는 제가 밥 먹으러 오라고 해서 불렀는데 그날따라 처음으로 딸기 한 봉지 사왔어요. 검은 봉지 안에 딸기가 한 줌 정도 들어 있었죠.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녀의 말이 압권이었습니다. “딸기가 너무 비싸서 천원어치만 샀다”는 겁니다. 이 말에 지난 22년간의 자린고비 행태에 대한 스트레스가 폭발하면서 딱 꼴 보기 싫어졌습니다. 그 뒤로 연락 안 하고 바쁜 척하고 있습니다. 돈 문제에 대해 얘기하자니 너무 쪼잔해 보일 거 같고, 또 얘기를 안 하자니 이제 그녀에게 10원도 쓰기도 싫고. 어쩌면 좋을까요?

오래 만났다고 절친은 아니죠, 그 친구와 같이 있을 때 내 모습이 멋져야 건강한 우정입니다

A 저도 그런 친구 몇 겪어 봤습니다. 한번은 용기 내서 돈 얘기를 좋게 좋게 꺼내려고 해봤어요. 그런데 친구가 먼저 그 얘기를 꺼내더라구요. “난 같이 뭐 먹으러 가서 돈 안 내는 사람 너무 짜증나더라. 그거 몇 푼 된다고 계산할 때 당연하다는듯이 얻어먹냐. 애들이 참….” 쇼킹했습니다. 그 친구도 누군가에게는 ‘내는 역할’이었던 모양입니다. 또 한번은 다른 짠순이 친구에게 “너도 가끔은 걔네들 밥 좀 사주고 그래라”고 한 소리 했더니 그 친구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맨날 얻어먹는 것처럼 보여도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내가 걔네들 얼마나 케어해 주는지 네가 몰라서 그래.” 돈은 아니지만 시간과 감정을 투자했다 이거고, 골목대장이 코흘리개 애들보고 앵벌이 시켜 먹는 것 같아도 실제론 그들의 코를 닦아주는 것은 자기라는 소리죠.

그럴싸한 응수에 설득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건 ‘입장 차이’라는 것이죠. 아무리 자린고비 친구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돈을 쓰면서 억울해하거나 돈을 안 쓰면서 다른 방식으로 보답을 한다는 겁니다. 당신의 짠순이 친구도 돈을 써야 할 때는 썼겠지만 당신에게는 열 번에 한 번꼴로만 투자해도 충분했고 대신 다른 가치로 충분히 보완해 왔으니까 공정한 우정이었다고 자부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가 기쁘기 위한 기본은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의 내 모습을 내가 좋아하는가’일 것입니다. 그 친구가 멋지고 재밌어서 일방적으로 좋은 것도 있지만 그 사람과 함께할 때의 내가 멋지고 재밌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가치가 더 큽니다. 건강한 관계이기도 하구요. 예전의 당신은 가난한 친구를 돕는 인간성 괜찮은 자신의 모습에 그럭저럭 만족해 왔으니 돈이나 노력이 안 아까웠겠지요. 하지만 지금 그녀를 위해 돈을 쓴다면 스스로가 비굴하고 초라한 약자처럼 느껴지겠죠. 뭘 밑져서 늘 갖다바쳐야 하는지 울화통 터질 지경!


허심탄회하게 돈 문제 토로해 버리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성격 좋다는 그녀가 상황을 이해하고 미안해한다고 가장 낙천적으로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기본적으로 ‘피플 플리저’(나보다도 남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무리하며 노력하는 사람)의 습성을 가진 터라 오히려 향후 돈 계산 할 때마다 더 신경 쓸 것만 같습니다. 그녀가 밥 사면 괜히 미안해져서 그보다 더 비싼 커피값 낼 당신입니다. 그녀가 사주는 밥을 먹을라치면 ‘성공한 친구가 얄미워서 이제 와서 뜯어먹으려는 속 좁은 친구’인 것처럼 느껴져 ‘엎드려 절 받기’ 기분이 불편할 것입니다. 게다가 제아무리 그녀가 선뜻 돈 팍팍 이제부터 쓴다 한들 22년간의 부채(?)를 대체 몇 번 우려먹음으로써 탕감하고 성에 차겠습니까. 옛 습성 다시 나오면 그땐 또 어찌하리오. 한 번 화낼 순 있어도 두 번 화내면 정말 치사한 인간 되어 버리잖아요. 돈 얘기 해 봤자 당시에는 시원할 것 같지만 에이에스가 심히 피곤해질 것만 같습니다.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오래 만났다고 ‘절친’은 아니구요, 하고 싶은 말 이십여년간 한 번 못한 것은 우정이 아닙니다. ‘아쉬운’ 사람이 돈 내는 건 주종관계구요, 그 친구와의 관계에서 돈 내는 것뿐만 아니라 운전사 노릇을 하고, 먼저 전화를 걸고, 약속 장소 검색 및 예약을 도맡아 하고, 때마다 선물 챙기고, 마무리 문자메시지 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등 감정노동에 대한 책임감을 더는 가질 필요는 없겠지요. 같이 손잡고 화장실 가줄 사람이 필요한 나이도 지났구요, 빚진 거 아니잖아요. 그거 아세요? 당신은 호의로 돈 냈다 해도 받는 입장에서는 고마운 마음과 더불어 굴욕감이 생긴다는 거. 그 엉킨 감정을 직면하기가 싫어 대개 받기만 했던 사람들은 돈에 둔감한 척하는 겁니다. 게다가 싱싱할 것 같지도 않은 딸기를 천원어치 사오다니, 발상 너무 촌스럽잖아요. 돈 안 쓰는 것보다 둔감하고 센스 없는 게 더 나빠 아주.

임경선 칼럼니스트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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