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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었어요

등록 2009-02-18 19:24수정 2009-02-22 11:39

아픈 몸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었어요
아픈 몸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었어요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스물넷 된 처자입니다. 몸이 안 좋다는 걸 알았어요. 당장 죽을 병은 아니지만 불치병이고 진행성이라 그 우울함을 말할 길이 없습니다. 주변에선 무리하지 말라 하고, 갑자기 환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어요. 저는 20대잖아요. 되고 싶은 것도 많고 치열하게 살고 싶은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니까 너무 무기력해져요. 원래 산다는 게 벼랑 끝에 서 있는 일이라는 거 몰랐던 건 아니지만 그 벼랑 끝에서 발 헛디딜 확률이 높아졌다는 게 힘들어요. 당장 죽을 게 아니면 뭐라도 해야 되는데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는 투자를 저 자신한테 납득시키기가 어려워요. 능력이 부족해서 성실히 하지 않고도 무언가를 쉽게 가져본 적도 없고요. 제 삶의 의미가 뭔지 잃어버렸습니다. ‘너보다 더 못한 사람도 많다’는 말은 귀에 아직 잘 안 들어오네요. 위만 보고 살았지 밑을 본 적도 없구요. 사실 밑을 보고 싶지 않아요. ‘원래 삶은 불확실한 거다’라는 말도 위로가 안 돼요. 아픈 사람 태반이라지만, 십년 이십년 뒤도 아니고 지금은 너무 일러요. 건강한 친구들, 치열하게 사는 젊은이들, 사실은 아픈 할머니조차도 부러워요. 예전처럼 꿈을 향한 과정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은데 나날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몸 때문에, 그 생각만 하면 웃을 수가 없어요. 도와주세요.

병보다 무서운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건 몰두할 수 있는 무언가 그리고 사랑뿐

A 머리가 너무 무거워 멍하고 입속은 바짝 타 있고 사지 힘 하나도 없고 아침에 일어나는 게 살아 있는 지옥 같고 그렇지? 그 공황의 시기 몇 달 안 가.

그 과정에서 이런 말들로 위로받으려고 애쓸 필요 물론 없지.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더 심한 경우도 있는데)’. 더 불행하고 덜 불행한 사람과의 비교는 끝도 한도 없고 남의 장례식 가서 내심 기분 업 되는 야비함 같아서 말이지.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어’ 이 말도 글쎄다, 공짜로 얻어지는 건 없어. 뭐니 뭐니 해도 건강 잃는 게 제일 밑지는 건 기정사실이고. 보통 큰일 당하면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가족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선물로 토닥토닥하지만 이런 개념들에 의존하기엔 당신은 너무 젊고 게다가 인생 막장도 아님. 삶의 의미? 그딴 건 원래 없었어. 원래 삶이란 무의미한 건데 그 무의미함의 고통을 최소화하려고 인간 각자가 알아서 요령껏 ‘재주’부리는 것뿐이야.

한가지 확실한 것, 현실만 받아들여. 그건 이제 그 병이 당신의 정체성 중 하나가 되었다는 기정사실이야. 환영할 만한 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어. 그놈이 와서 여러 변화가 있을 거라는 사실도 받아들여. 가장 큰 변화는 ‘불안’이 극대화된다는 것.

당신은 앞으로 겪게 될 상상 초월의 불안과 더불어 살아나가기 위해서 불안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필요해. 불안을 없애지는 못하니까, 그걸 넘어서게 해주는 그 무엇, 그것은 열심히 몰두해서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이야. 이걸 갑자기 찾으라 해도 쉽진 않겠지만, 지금으로선 찾을 의욕도 방법도 보이지 않겠지만, 이윽고 부단히 찾을 수밖에 없을 거야. 사람들은 대개 말로는 내 길 찾겠노라며 선언해도 어디선가 운 좋게 내 길이 짠하고 알아서 열려주길 내심 기대하며 넋 놓고 있지. 고민한다 폼 잡아도 실제 허둥지둥 자기 길을 능동적으로 찾는 사람은 의외로 적단 말야. 하지만 우리에겐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누워 기다릴 여유가 없단 말이야. 왜냐구? 일찍 죽을 거니까? 아니, 누가 언제 죽는 건 아무도 몰라. 우리가 여유가 없는 건 몰두할 수 있는 뭔가를 어서 찾지 못하면 그 공백이 ‘불안’이라는 상상력으로 쉽게 채워져 훨씬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야. 하나 도와주는 건, 체력에 한계가 오면 기꺼이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우선순위 알기가 좀더 낫겠지. 미쳤다고 ‘밑’을 보냐? 타협? 거긴 심리적 낭떠러지야. 원래 하던 대로 ‘위’를 보되, 몸이 가벼워질 수 있게 핵심 가치만을 생각하며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콤팩트’해지란 말이야. 우린 필연적으로 너절하게 꿈꾸는 삶이 아닌, 집중해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어.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더불어 필요한 건 ‘사랑’! 불안이라는 변화로 인해 인간이 많이 예민해지고 씁쓸해질 테지만 실은 아픈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곱절로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해. 환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입으로 떠벌리는 모순된 행동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시험해보지 마. 누가 다가와도 병을 내걸고 ‘난 어차피…’ ‘너가 내 마음 알기나 해’라며 피차간에 상처 주지 마. 분에 넘치는 건강한 사람들의 친절을, 일종의 그들만의 축제가 아닐까,라고 의심하지 마. 남들이 내 병을 왈가왈부하거나 동정해도 분노할 것 없어. 아주 이기적인 이유로, 우선 현실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버텨내기 위해,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동기부여를 위해 타인의 체온을 필요로 하는 거니깐.

사실 난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지. 스물한살 때부터 이제까지 뭐 말하자면 불치에 진행성. 재수 좋으면 올봄에 다섯번째 수술 들어가(희귀 케이스라고 의사는 흥분하더군). 글 쓰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얄팍한 생각에 확 전업했어. 바꿔 말하면 그토록 사람들의 시선을 필요로 할 만큼 아주 많이 취약했다는 소리지. 참 삶은 희한해. 더 잃을 게 없을 것처럼 바닥을 치니까 전혀 몰랐던 ‘재주’가 어디선가 튀어나오더라. 이걸로 불안과 공허함을 달래고 나 자신과 내 (사랑하는) 사람들 즐겁게 해주며 인생 걍 이렇게 살려구.

임경선 칼럼니스트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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