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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에서 천국을 쫓다 한국에서 행복을 찾다

등록 2009-03-12 19:22수정 2009-03-13 14:53

중국 출신의 ‘바둑 여제’ 루이나이웨이 9단이 10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4층 특별대국실에서 티없이 맑은 웃음을 짓고 있다. 
 신소영 기자 <A href="mailto:viator@hani.co.kr">viator@hani.co.kr</A>
중국 출신의 ‘바둑 여제’ 루이나이웨이 9단이 10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4층 특별대국실에서 티없이 맑은 웃음을 짓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끝내기 없는 정상질주’ 철녀 루이나이웨이




“어! 그러시면 안 돼요.”

인터뷰를 위해 메모지를 바둑판 위에 놓았던 게 문제였다. “바둑판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며 소파 옆으로 판을 살며시 내려놓는다. 아차! 싶었다. 네모진 바둑판엔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여인. ‘철녀’ 루이나이웨이(46) 9단과의 대면은 처음부터 몇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바둑판에 생명이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섬기는 경건함은 충격이었다. 노트북 함부로 다루는 현대인들이 있다면 새겨들을 만하다. 바둑판 위에 신문지 깔아놓고 밥 먹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할까? 루이는 “달려가 음식 내려놓으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 루이에게 바둑은 종교이고 하느님이다.

세계 여자바둑의 ‘제왕’ 루이가 한국에 온 지 꼭 10년이 됐다. 강산이 변하는 그 기간 한국 바둑도 급성장했다. 한-중-일 반상의 변방에 밀렸던 여자바둑은 이미 일본을 제쳤고, 중국과는 어깨를 나란히 한다. 루이 한 사람의 등장이 바꿔놓은 여자바둑의 지형도다. 세계적 수준의 박지은 9단, 조혜연 8단, 이민진 5단 등의 여성 기사들은 모두 루이를 직간접으로 사사했다. 1970년대 특별입단 형식으로 조영숙 3단이 여성 기사로 활약했고, 90년이 돼서야 해마다 2명씩 여자프로를 입단시킨 한국 여자바둑. 척박한 이 땅에 루이는 상전벽해 같은 변화를 몰고온 기폭제였다. 젊은 여기사들은 루이와 대결하면서 전투력을 길렀고, 큰 그늘 아래 풍부한 자양분을 마음껏 섭취했다.

한국 온 지 10년…여류대회 또다시 싹쓸이
석류같은 웃음 뒤엔 처절한 ‘전사의 독기’

한때 남편 장주주와 ‘부부 결승대결’ 진기록
“남편이 한수위지만 상금만큼은 공동 통장에”

10일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 4층 특별대국실에서 루이를 만났다. 46살의 아줌마 기사는 “한국에 온 10년 동안 마냥 행복했다”고 했다. 붉은 잇몸을 드러내며 수줍게 웃는 루이의 모습을 누군가 석류가 터지는 듯하다고 비유했는데, 참 적절한 표현이다. 바둑 둘 때는 매우 공격적인 몸싸움으로 상대를 몰아붙이지만, 외면은 한없이 부드럽다. 전쟁의 처절함 속에서 오히려 평화를 깨닫는 역설의 경지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루이는 “바둑은 기본적으로 전투”라고 했다. 전쟁에서 단련된 철녀는 30년간 세계 여자바둑의 철권통치자였다. 역대 각종 결승전에 31회 진출해 25번을 이겼다. 남자 기사한테 세 번 패한 것을 뺀다면 여자 기사끼리의 대결에서는 승률 89%를 자랑한다. 그러나 “저 바둑 못 둬요. 젊은 후배들이 너무 세다”며 손을 내젓는다. “형세 판단도 어렵고 수읽기도 힘들어 대마 잡는 식의 바둑은 포기했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루이는 최강이다. 9일 가그린배 여류국수전에서는 이하진 3단을 꺾고 정상에 올랐다. 기성·명인·국수 등 국내 여류대회 3개를 제패해 다시 한번 ‘천하통일’을 이뤘다. 루이는 99년 이래 여류국수(통산 6회 우승) 여류명인(8회 우승) 여류기성(3회 우승)에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을 세웠다.

구만리 장천을 난다는 대붕도 때를 만나야 날개를 편다. 1988년 세계 최초로 여자 입신의 경지(9단)에 오른 루이의 세계화에는 한국 바둑의 개방성이 큰 구실을 했다. 중국기원의 관료주의와 연인 장주주 9단의 미국행 때문에 90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완고한 일본기원은 루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너무 실력이 세 일본 여자바둑을 석권할 것”이라는 걱정과 함께 이방인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루이는 “기전에 나갈 수가 없어 바둑 지망생을 가르쳐 지도료를 받으며 생활했다”고 회고했다. 루이를 알아본 것은 ‘살아 있는 기성’ 우칭위안(吳淸源)이었다. 우칭위안은 린하이펑에 이어 루이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본기원은 끝까지 루이를 정기사로 받지 않았다.

이런 루이에게 인생 2막을 열어준 것은 한국이었다. 6년간의 일본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마음은 공허했다. 그러다 미국에 있던 차민수 4단이 루이에게 한국기원을 노크하라고 권유했고, 99년 4월 한국기원은 루이-장주주 부부를 객원기사로 받아들였다. 2년 뒤에는 정회원이 됐다. 물론 루이의 한국 입성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프로기사들의 마음속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조훈현 9단과 차민수 4단 등이 “국내 여자바둑 활성화를 위해서 문을 열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루이는 “무엇보다 한국 여성 기사들이 나를 환영해주어서 고마웠다”고 했다.

일본과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 전개되자 루이는 엄청난 에너지를 얻었다. 10년간 유랑했던 루이가 안식처를 찾았고, ‘루이 효과’는 여자바둑으로 퍼졌다. 외래 문화나 문물, 인물은 수용자 쪽의 개방적인 태도에 따라 엄청난 창조력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루이의 역사는 두 개의 장면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86~89년 중국 전국개인전 여자부 4연패를 해낸 루이는 어디까지나 중국 국내스타였다. 국제기전인 보해배 1회(94년), 3회(96년), 4회(97년)에서 우승했을 때도 세계무대에 확실하게 각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 43기 국수전과 2003년 맥심배 입신최강전에서 초유의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99년 여류국수 타이틀을 따낸 루이는 대한민국 최고 전통의 43기 국수전에 참가한다. 아무리 강호라지만 여자는 ‘한 수 아래’라는 게 당시 바둑계의 정서였다. 그런데 루이는 한국 바둑의 천왕들을 잇달아 무너뜨렸다. 유창혁 9단을 예선에서 제압했고, ‘국보’ 이창호 9단도 4강에서 눌렀다. 결승에서는 ‘전신’(戰神) 조훈현 9단마저 물리치며 우승을 차지했다. “저도 어떻게 이겼는지 모르겠다. 운이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권위 있는 오픈대회에서 여성이 우승한 첫 사례다. 2003년 맥심배 4기 입신최강전은 어떤가.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9단만이 참가하는 이 대회에서 루이-장주주 부부는 결승에서 만났다. 장주주의 2-0 승리로 끝났다. 루이는 “남편이 더 잘 둔다. 그러나 상금은 공동 통장으로 들어갔다”며 웃었다. 부부의 결승전 대결은 앞으로 다시 이뤄지기 어려운 사건이다.

상하이에서 난 루이는 10살 때 아버지한테 처음 바둑을 배웠다. 일찍부터 승부사 기질을 타고나 지면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한다. 루이는 “요즘도 싸움에 진 날은 새벽 5시까지 잠을 못 잔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잊을 수 있지만, 눈을 감는 순간 진 바둑판이 또렷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것은 “가슴을 콕콕 찔린 것처럼 아픈 상처”라고 표현했다. 그는 지지 않는 바둑을 둔다. 공부는 루이의 트레이드마크다. “밥 먹을 때, 책 읽을 때를 빼놓으면 나머지 시간은 남편과 함께 주로 기보를 연구한다”고 했다.

루이를 떠올리면 커트 머리와 바지 차림이 연상된다. 루이는 “한국에 올 때 긴 머리를 친 뒤 지금까지 커트 머리를 고집한다. 산뜻해서 좋다”고 했다. 옷차림새에 신경쓸 일도 별로 없다. 홍익동 한국기원 옆에 사둔 33평 아파트는 소중한 보금자리다. 프로기사 선후배들을 초청해 음식 솜씨를 자랑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고향의 부모님한테는 1년에 2~3차례는 꼭 찾아간다. 루이는 언젠가는 중국에 돌아갈 생각이다.

사실 루이한테 고향이나 조국은 바둑이라는 큰 개념 앞에선 하위개념일 뿐이다. 바둑은 영원한 고향이고, 이상향이다. 루이와 장주주의 자서전인 <우리집은 어디인가?>엔 “아무리 지옥 같은 곳이라도 바둑을 둘 수 있으면 내게는 천국이고, 아무리 천국 같은 곳이라도 바둑을 둘 수 없으면 내게는 지옥”이라고 썼다. 루이는 심지어 “져도 이겨도 바둑은 둬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 바둑은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루이는 “후진 양성보다는 바둑을 두는 그 자체에 더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자기 내면과 싸우는 외로운 승부를 즐긴다. 그래서 지옥에서라도 바둑판을 짊어지고 다닐 여걸로 불린다. 한국에 머문 10년 동안 바둑을 둘 수 있었기에 “계속 기뻤던” 루이. 그는 범인들의 세상에 사는 기인이다.


루이나이웨이 9단과 남편 장주주 9단은 ‘바늘과 실’처럼 떼놓을 수 없는 평생의 바둑 동반자다.  신소영 기자
루이나이웨이 9단과 남편 장주주 9단은 ‘바늘과 실’처럼 떼놓을 수 없는 평생의 바둑 동반자다. 신소영 기자

아내는 흑돌 남편은 백돌…태평양도 가로막지 못한 ‘러브스토리’

루이나이웨이(芮乃偉)는 남편 장주주(江鑄久) 없이 얘기하기 어렵다. 두 사람은 연인이며 친구이며, 바둑의 동반자이다. 1년 365일 가운데 335일은 둘이 함께 붙어 있다. 바둑을 연구하고 여행을 다니고, 때로는 책을 공동집필하기도 한다. 불가피하게 떨어져 있는 30일은 메신저로 연락하며 끈을 놓지 않는다.

두 사람의 만남에는 바둑 낭만시대와 사회주의 중국의 이미지가 겹쳐 있다. 일찍이 중국 국가대표에 뽑혀 서로 알기는 알았다. 특별한 감정을 갖지 않았던 두 사람이 급격히 가까워진 것은 1987년 중-일 바둑대회가 계기였다. 중국 싼샤의 장강을 유람선을 타고 내려가면서 연 바둑대회는 선가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중국바둑 지도부는 당시 “여자 기사들은 남자 기사의 방에 가면 안 된다”는 지침을 내렸다. 루이는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 9단의 청에 비공식 바둑을 두다가 이 규정을 어겼다.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져 호된 질책을 받은 루이는 큰 상처를 입었다. 당시 유일하게 루이를 옹호한 사람이 장주주였다.

둘은 중국 밖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싶었다. 장주주가 1990년 먼저 미국으로 날아갔다. 루이는 비자 문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부터 태평양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열애는 2년을 이어갔다. 인터넷도 없었던 시대. 바둑지망생 지도비로 생활하던 루이는 월세만큼 국제전화요금을 내야만 했다. 1992년 장주주가 일본에서 열린 잉창치(응창기)배에 참가해 재회한 뒤 곧바로 중국대사관에서 혼인신고를 했다.

둘의 취미는 여행과 글쓰기다. 지금까지 유럽과 북미대륙 등 15개국을 돌아봤고, 지난해에는 티베트를 다녀왔다. 루이는 요리를 할 때와 시장보기, 뉴스 시청, 그리고 영화광인 남편과 함께 거실에서 영화를 볼 때를 제외하면 바둑과 논다. 좋아하는 영화는 <카사블랑카>이며 한국 배우로는 이정재가 좋다고 한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는 서예로 정신을 모은다. 바둑, 여행, 서예, 요리는 루이의 네 친구이다.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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