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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내 인생, 폭력의 역사에 멍들었지요

등록 2009-04-30 19:17수정 2009-05-02 11:21

오웅근 전 허베이대학 교수의 인생은 현대사 그 자체이자 고난의 연속이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살다가 관동군에 끌려가 소련 시베리아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 다시 중국에 돌아온 그는 의사가 되었지만 문화혁명 때 일본 부역자로 몰려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다. 이후 교수가 된 뒤 일본을 상대로 하는 보상 운동에 헌신했던 그는 한반도의 통일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유강문 기자 <A href="mailto:moon@hani.co.kr">moon@hani.co.kr</A>
오웅근 전 허베이대학 교수의 인생은 현대사 그 자체이자 고난의 연속이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살다가 관동군에 끌려가 소련 시베리아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 다시 중국에 돌아온 그는 의사가 되었지만 문화혁명 때 일본 부역자로 몰려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다. 이후 교수가 된 뒤 일본을 상대로 하는 보상 운동에 헌신했던 그는 한반도의 통일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오웅근 전 허베이대학 교수
태평양전쟁 일본군 징집 4일만에
총알 세 개 박혀 시베리아로…
추위·중노동 속에 넘나들던 사선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140㎞ 떨어진 바오딩(보정)에 허베이대학교가 있다. 학교의 전신은 1920년 프랑스 가톨릭수도회인 예수회가 텐진에 세운 톈진공상대학이다. 1970년 이곳으로 교사가 이전됐다.

허베이대학교 인근에 교직원들 대상으로 분양한 주택단지에 한 조선족 은퇴 교수가 살고 있다. 1925년생이니 올해 84살의 고령이다. 죽을 고비를 세 차례 넘겼다고 스스로 말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소련군과의 전투 때, 시베리아에서 포로로 강제사역을 하던 때, 그리고 문화혁명 때라고 한다.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은 오웅근 전 허베이대학 교수를 지난 12일 자택에서 만났다. 시베리아 억류 경험자 가운데 북한을 거쳐 중국 동북3성으로 돌아간 동포들의 삶을 듣기 위해서였다.

-고향이 두만강변인 함북 종성군 풍곡면으로 되어 있던데요.

“거기는 아버지의 고향이고 나는 간도성 석현에서 조금 들어간 신제촌이란 곳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새로 만든 마을이라는 뜻인데 조선인 부락이었지요.”

-자라면서 항일 게릴라 움직임을 듣거나 본 적이 있나요?

“아버지나 사촌형은 직접 겪었습니다. 신제촌에 항일 빨치산들이 나타나 어떻게 알았는지 친일분자들의 집에 방화를 하고 일부는 끌고 가 처단을 하는 일이 드물게 있었지요.”

그는 간도 용정에서 중학교 과정인 광명국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총리 국회의장을 지낸 정일권,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 시인 윤동주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만주국의 신경사관학교를 나온 정일권은 일제 때 길림헌병대 대장을 했다.

-45년 징병 2기생으로 관동군에 끌려가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일본대학에 들어가려고 도쿄에 갔는데 만주의 공립중학교 졸업자는 아예 시험자격조차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도쿄의 치산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전황이 악화되자 돌아오라는 연락이 집에서 왔습니다. 간도로 돌아가 1년쯤 집안일을 돕다가 45년 8월10일까지 북만주 하이라얼의 515부대에 입영하라는 영장이 나왔습니다.”

-그날은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한 다음날인데 실전을 겪었습니까?

“조선인 입대자들을 태운 기차가 하이라얼역에 도착하자마자 소련 전투기가 공습을 해왔어요. 부대에 도착해 조선인 신병 3백명과 일본 예비역 1백명을 합쳐 1개 대대가 급히 편성됐지만, 소련군의 공격이 격화되자 막사에 불을 지르고 후퇴를 거듭했지요. 조선인 신병에게는 총 같은 기본무기조차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8월14일 소련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나는 세 군데나 총상을 입었어요.”

그는 왼쪽 귀를 보라고 가리켰다. 총알이 스치고 지나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맹관총상’이라는 낯선 말도 썼다. 관통총상의 반대어인데 넓적다리에 총알이 그대로 박혔다고 한다. 일제의 국책회사였던 남만주철도(만철)의 건물에 임시수용돼 소련군 위생병의 응급치료를 받았다. 건물 안에 책이 많이 쌓여 있어 들쳐보다가, 도쿄외국어대 교수가 쓴 러시아어 독본을 발견했다. 소련이 일본에 이겼으니, 러시아말을 배워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혼자서 한두 마디씩 연습을 했다. 그는 시베리아 치타의 육군병원으로 후송돼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자 인근의 수용소로 옮겨져 다른 일본인 포로들에 합류했다.

오웅근 전 허베이대학 교수
오웅근 전 허베이대학 교수
-첫해 겨울에 일본인 포로의 1할 정도가 추위 굶주림 중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는데 어떻게 그런 몸으로 살아남았나요?

“3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연습한 러시아어 공부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벽돌공장 등 작업 현장에 나가 주로 통역을 했으니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피할 수 있었지요. 그러다 47년 7월께 소련군 정치장교가 불러서 수용소 내에 신분을 감추고 숨어 있는 특무기관원이나 헌병 출신들의 정보를 수집해서 보고를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마음이 내키지도 않았지만, 그런 정보를 내가 알 수도 없었지요. 아무런 실적이 없자, 10월혁명 기념일에 지급됐던 새 군복이나 신발을 뺏어가고 낡은 군복을 주었습니다. 통역 일도 못하고 다른 수용소로 옮겨져 삼림벌채 등의 노동을 했습니다.”

그는 명백히 협조 거부에 대한 보복으로 생각했다. 48년 1월께 다시 생사의 기로를 넘었다. 영하 40도의 날씨면 모든 옥외작업이 중단됐는데 그는 일본인 포로 1명과 함께 작업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트럭을 타고 외진 역에 가서 엔진을 갖고 오라는 거였다. 현장에 도착하니 너무 추워 불을 피우려 해도 태울 것이 없었다. 마침 긴 화차의 대열이 정차해 있는 선로의 건너편에 통나무가 보였다. 화차 밑으로 기어가 통나무를 끌고 나오려는 순간 기차가 덜컹 움직이기 시작해 겨우 빠져나왔다.

-조선인 억류자들은 대부분 48년 말 나홋카에서 소련 화물선을 타고 흥남으로 돌아옵니다. 연고지가 만주인 사람들이 흥남에서 다시 중국으로 가는 과정은 순탄했나요?

“흥남여고에 한동안 수용돼 있다가 기차편으로 함흥 청진 회령 남양까지 가서 다리를 도보로 건넜습니다. 302명이 같이 이동을 했고 아마도 도문극장에 임시수용됐다가 흩어진 것 같습니다. 나중에 한두 사람씩 개별적으로 소련 연해주에서 훈춘 등을 거쳐 바로 돌아온 사람들이 18명 정도 되지요. 시베리아 억류자 가운데 중국에 정착한 조선사람은 320여명으로 봅니다. 내가 연변에 온 게 49년 1월15, 16일께입니다. 중국 당국의 특별한 조사는 없었구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재개된 시기에 돌아왔는데 어느 쪽이든 가담하도록 압력을 받지는 않았나요? 한국전쟁 동안 중국 의용군에 지원한 사람은 없었습니까?

“당시 동북3성은 이미 해방돼 공산당 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군대에 들어가라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남북한에 흩어졌던 억류귀환자들이 전쟁에 참가했겠지만, 중국에서는 그런 경우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홍군에 참여했던 조선족 병사들이 북조선 인민군에 들어가 참전한 경우는 있지요.”

-어떻게 의사의 길을 걷게 됐습니까?

“돌아온 첫해에 다른 사람들은 제지공장 등에 취직을 했는데 나는 석현중학교에서 대수(수학) 선생을 했어요. 당시는 중국 경제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공산당이 만주에서 승리는 했지만 재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가 폐쇄됐습니다. 교사들도 갈 곳이 없어 일부는 전직을 하고 나는 연변대학 의학부에 진학을 했지요. 5년 과정이어서 55년에 졸업하고 내과의사가 됐습니다.”

다시 돌아온 중국선 문화혁명
이번엔 일본군 경력에 ‘반동’ 몰려
악몽의 세월은 너무나 길었다

-어떤 진료활동을 했나요?

“국무원 중앙부처의 하나인 야금부 산하 지질조사대에 의사로 배치됐지요. 중국에서 모든 진료는 무료이니까 의사로서 고충도 적지 않았습니다. 일꾼들이 일을 하기 싫으면 위생소(의무실)에 와서 담배 피우고 한두 시간 쉬다가 갑니다. 때로는 본인 것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약까지 요구하며 의사를 폭행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보고 약을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페니실린 마이실린 등의 약을 달라고 하니 말싸움이 벌어지지요. 승급을 할 때 지도자의 평가와 군중의 의견을 반영해 결정하므로 원칙대로 하는 의사는 손해를 보게 됩니다.”

-60년대 문화혁명기에 큰 고초를 겪었다고 하던데요.

“65년 지린성 훙치링 니켈광산의 위생소로 전속되고 1년쯤 뒤 문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기존의 관리체계가 붕괴되고 홍위병들이 반동과 투쟁한다며 모든 조직의 주도권을 장악했지요. 나는 일제 때 관동군에 끌려갔는데도, 중국 인민의 적인 일본 군대에 들어갔다고 심한 추궁을 당했습니다. 긴 종이를 주고 스스로 죄명을 쓰라고 다그치지요. 도대체 무슨 죄를 졌냐고 항변하면 관동군 병사를 하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결국 ‘일본 관동군 사상반동분자’ 라고 썼지요. 60년대 초기 동북3성에 대기근이 들어서 조선족들이 식량을 구하지 못해 몰래 북조선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당시 나도 북조선에 가서 일을 하고 싶다고 당 조직에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는데 그것도 화근이 됐지요. 사회주의 조국을 배신하려 했다는 거지요. 중국과 소련 사이에 이념논쟁이 격화되면서 중국과 북조선의 관계가 악화됐을 때입니다. 관동군 사상반동분자라고 쓴 종이를 붙인 큰 널빤지를 목에 걸고 반나절 동안 광장에 서 있게 하거나 거리를 끌고 다니며 두드려패니 견딜 수 있나요. 몇 차례나 빈사 상태가 됐습니다. 그런 사태가 2~3개월 지속되다가 인민해방군이 질서 유지를 위해 개입하면서 악몽이 끝났지요.”

-일제 때 징병으로 끌려간 동포가 무수히 많았을 텐데 다른 조선족도 심하게 당했나요?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는 일본군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다 아니까 그런 일이 별로 없었는데, 나는 외딴 산골에서 근무하다보니 곤욕을 치른 것 같아요.”

-의사로 쭉 재직을 하다가 어떻게 일본어 교수가 됐습니까?

“1년 내내 오지나 산골에서 근무를 하다보니 자식 공부 시키는 게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우연히 신문에서 허베이대학이 일본어 교수를 뽑는다는 공고를 봤습니다. 지질조사대 지도부에 시험 치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졸랐지요. 수십년 동안 일본어를 쓰지 않았는데도 1등을 했습니다. 81년 허베이대학에 자리를 얻어 처음 서너 달은 러시아어를 가르치다가 일본어 담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대학으로 옮겼기 때문에 몇 년 후 부교수로 퇴직했지요.”

-한국의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조선은 하나로 통일돼야 합니다. 절대로 둘이 될 수 없습니다. 북조선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압니까? 생활이 빈한한 사람을 깔보면 안 됩니다.”

바오딩/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일본 잡지 <후센>(부전) 1989년 7월호
일본 잡지 <후센>(부전) 1989년 7월호

일본 상대로 보상운동, 번번이 좌절

오웅근 전 교수의 인생 역정이 외부로 알려진 것은 80년대 중반 중국에서 실시된 일본어 작문 현상공모에 응모한 글이 당선되고 나서다. 징병으로 끌려가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죽을 뻔했던 경험을 쓴 <맨손의 병사>란 수기는 몇 년 뒤 반전 평화운동 계열의 일본 잡지 <후센>(부전) 1989년 7월호(사진)에 전재됐다.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오구마 겐지가 글을 보고 편지를 보낸 것이 인연이 돼 두 사람은 96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중국의 조선족과 일본인의 공동투쟁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았지만 패소했다.

오웅근씨는 이에 앞서 억류생활을 같이 했던 조선족 동포들을 모아 보상운동을 펼치려 했지만, 중국 공안의 경고를 받고 포기했다. 개인적 행위는 괜찮지만 단체를 이뤄 활동하는 것은 안 된다는 지시였다. 김효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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