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찾기 전에 네 자신부터 알라 /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라’는 말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Q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라’는 말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많은 심리학 책이나 자기개발서들을 보면, 이와 비슷한 말들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라’ ‘자신의 슬픔을 충분히 만끽하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놓아주라’ 뭐 대충 이런 말들이 많이 나오는데, 결국 다 비슷비슷한 말이겠죠? 문제는, 저 말들을 보고 막상 제가 그렇게 해 보려 하면 막막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불확실한 미래와 진로에 대해 두렵고 우울한 날이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두렵고 우울한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요? 그건 이미 저도 인정하고 있다 보니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습니다. 그러곤 또 아무런 진전이 없어요. 불안하고 우울한 기분만 지속되고요. 저는 뭔가를 빠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밥을 떠먹여 달라는 말 같아 질문드리긴 좀 그렇지만요.
A 먼저, 저 세 가지 말들은 배경이 다르답니다. ‘자신의 슬픔을 충분히 만끽하라’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놓아주라’는 슬픔, 분노, 자괴감과 같은 ‘결과로서의’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얘기들이며, 이런 감정들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직시해서 바닥까지 치고 올라와야 회복도 빨라 불필요한 자학이나 죄의식을 정리할 수 있다는 조언입니다. 반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라’는 말은 상황의 끝이 아닌 시작을 끌어내고 실천을 일으키기 위한 조언으로서 여기서의 감정은 되레 자신의 긍정적인 욕망을 말하지요. 이게 당신에게 적용되는 케이스죠. 문제는 스스로의 욕망이 뭔지 제대로 모르니까 두렵고 우울하고 뭘 할 마음도 안 생긴다는 거.
한편,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라’는 되레 여타 행복론의 단골 레퍼토리 세 가지와 비슷비슷하답니다. 첫째, ‘자신을 사랑하라’. 자존감이 없어 자신을 사랑하기가 힘들면 마음속 목소리를 무시하게 되니 점점 본능적으로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알 수가 없어 나답게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과 멀어질 우려가 있지요. 둘째, ‘타인과 비교하지 말자’. 타인의 이목에 신경 쓰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끼게 만드는 상대와 쓸데없이 비교하니까 당최 행복하기가 힘들죠. 멋져 보이는 타인의 모습이든 나를 향한 타인의 관심이든, 대부분 자신의 상상 속 산물에 불과한데 말이죠. 상대적 비교로 눈치 보고 무리하고 자의식 과잉 환자로 숨막혀하기보다 그 에너지로 자신과 소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걸 하라’. 말해 뭐합니까, 한 번뿐인 내 인생, 내 감정에 충실하게 기왕이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단연 최고입니다. 정말이지, 자기 욕망을 제대로 알고 구체화시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인만큼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실제 실천하는 사람들 보면 참 대단들 하죠.
그러나 ‘내 감정에 충실’이라는 말의 멋들어진 울림에 혹해서 가끔 착각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가령 어떤 이는 회사를 다니다가 반년쯤 지나면 꼭 하고 싶은 다른 일이 퍼뜩 생겨 기존 회사에 대한 마음이 떠버려 전직을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고 과감하게 도전했다 하지요. 이건 감정에 충실한 걸까요? 제 사견으론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 갖고 놀다가 금세 질려 새 장난감 찾는 ‘제멋대로’의 형국인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실책으로 회사에서 잘린 것임에도 마치 자신은 곧은 의지를 관철시키려다가 그것이 꺾였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감정에 솔직했으니 후회 없다는 한마디를 날리면서. 감정에 솔직한 걸까요? 정말 왜 잘렸는지 모르는 바보이거나 인정 안 하면서 자존심 보호하려고 변명하는 걸로 들립니다. ‘결혼에 있어서 사랑도 조건도 포기할 수 없어요’라며 감정에 충실하고 싶지만 이성의 목소리도 무시 못하겠다는 여자분들, 이미 가진 걸 버리긴 싫지만 더 많은 걸, 이도저도 다, 다, 다, 가져야겠다는 거죠. 감정에 충실한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포기하지 말고 고고씽해야 할까요? 할 수 있다면 함 해보십시오, 이 욕심쟁이들아!
내 감정에 충실하고 순수하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 외의 모든 것을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무욕의 마음에서 우러나야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가장 소중한 것’이 뭔지 모르니까 그때그때의 감정에 제 자신이 휘둘리며 홀라당 춤이나 출 뿐이지요. 결과적으로 파생되는 민폐나 악취에 대해서도 ‘내 감정에 충실했으니 됐어’라고 포장 마무리하는 건 좀 치사해 보입니다. 욕망의 게임에도 룰과 매너가 있는 건데요.
그래서 전 ‘퀸 오브 처세 조언’은 더도 덜도 말고 소크라테스님의 더 클래식, ‘너 자신을 알라’인 것 같습니다. 요 녀석이 가장 신용이 가요. 행복을 향한 액션 플랜의 모든 시작점은 바로 자신에 대한 냉철한 인식. 여러 인간관계나 인생 경험을 통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나라는 사람의 약하고 강하고 야비하고 우스꽝스러운 점을 겸허히 파악한 가운데 좋은 점은 최대한으로 늘리고 나쁜 점은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세상에 범람하는 행복론 조언 설레바리를 끌어안기 전에 취해줘야 할 액션1-A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막말로 내 머리나 마음에 뭐가 좀 들어가 있어야 소통할 거리라도 있고, 뭐 좀 기특한 구석이 있어야 사랑도 하겠고, 그렇게 단단해야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기 소신껏 살아갈 기량이 생기는 거잖아요? 감정에 충실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는! ‘잘난’ 인간 말고 ‘괜찮은’ 인간 말입니다. 나부터 잘하자, 썅.
임경선 칼럼니스트
※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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