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굿바이 /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슬프고 허탈한 마음에 힘들어하는 나, 너무 예민한 걸까요?
저는 최근 감정적으로 좀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고3으로 사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최근 그 우울한 소식에 슬프고 허탈합니다. 평소에도 제 친구들은 사내놈인 넌 너무 눈물과 잡생각이 많다고 뭐라고 하는데, 요새는 특히 머리가 아플 정도로 죽음과 관련된 생각에 빠지게 되네요. 그러다가 마음이 초조해지기도 하고 갑자기 짜증이 나기도 하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친구들 말대로 좀더 대범하게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내가 남아날 것 같기도 한데, 제가 아직 어려서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건지요. 더 상실감에 힘들어질 것 뻔하면서도 그분을 심적으로 못 떠나보내고 틈만 나면 모든 관련 뉴스나 기사를 허기진 듯 찾아 읽고 있습니다. 전 자학하는 걸까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 것 역시도 여전히 적응이 잘 안 됩니다. 좀더 많은 것들이 궁금해 답답한 마음에 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얘기하다 보면 아버지 말씀에 자꾸 ‘그래도…이렇고 저런 거 아닌가요’ 식으로 토 달게 되고 그러면 아버지는 말대꾸한다고 화내시면서 저에게 쓸데없는 생각 말고 네 할 일(공부)이나 하라고 하십니다. 현실은 원래 이런 것이려니,해야 되는 걸까요. 님도 역시 ‘학생은 공부나 열심히 해’라는 말을 해주실 건가요.
A 아버지께 말대답한 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어른들이 해주는 말을 의심하고 뒤집어보는 것은 나쁘지 않아요. 뭔가 석연치 않아 보이지만 어른의 말씀이라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요. 대화하다가 순간 벽을 느끼고 귀찮아져서 “맞아요. 그러네요”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 하는 게 가장 살기 쉬운 길일지는 몰라도 말대답, 반론 한 번 못한 채로 어른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쓸쓸하고 무서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렇게 길들여진 아이들이 나중에 어른 되어 드글거리는 대한민국은 생각만 해도 오싹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대체 왜 그러셨을까요? 자식이 말대답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대개 자신들이 맞다고 생각해왔던 명제나 전제가 흔들리는 것이 두려워서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좋게 해석해 드립시다. 아버지도 이 땅의 어른으로서 청소년인 자식에게 민망스런 마음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처럼’ 당신 아들의 귀와 눈을 막고 싶어했을 것 같습니다. 실은 사람은 갑자기 죽는 게 아니라 조금씩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고 겹쳐서 죽어간다는 훈훈한 이야기를 무슨 낯짝으로 사랑하는 아들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자식들은 늘 부모의 생각보다 한 뼘 더 조숙한 법. 고교생이면 이 비현실적인 현실을 소화하기에 생각해보면 그리 어린 것도 아니지요. 지금 가지고 있는 민감함을 애써 부정하며 스스로를 또래 중 비주류로 몰고 갈 필요는 없습니다. 민감함은 더 많은 것을 흡수할 수 있고 감지하며 비판정신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자산이니깐요. 비단 사춘기 나이 탓이 아니더라도 유례없는 충격적인 일을 겪음으로 해서 느끼는 혼란스런 불안감은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여러 불안 중에서 죽음에 대한 불안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것이고 그 죽음이 부조리하다면, 그 죽음이 누구보다도 생명력이 넘쳤던 사람에게 덮쳤다면, 더더욱 그 반전이 주는 무기력감에 숨막히고 머리가 무거울 테니까요.
다만 축 처진 상태로 드러누워 있는 지금의 그 어두운 방은 고통스럽지만 어쩌면 매우 편안한 장소일 수도 있다는 것만은 알아줘요. ‘우리 모두 함께’라는 심리적 단합과 소속감에 또 생각만큼 외롭지 않을 수가 있구요. ‘악’을 함께 겪다보니 ‘선’해진 덕에 기분이 더러우면서도 동시에 눈물로 정화되고 순결해지는 기분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그 어두운 방에서 부디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뒤통수에 벼락맞아 어두운 방에 우르르 다 함께 울며 들어갔지만 나올 땐 혼자 힘으로 각자에게 적합한 타이밍에 빠져나와야만 합니다. 저마다 필요한 만큼 있다가 나오면 되는 것이고, 누가 먼저 나간다고 뭐라고 하지 않아요. 언제가 나갈 시기냐 하면, 추억을 내 입맛대로 각색해 나가는 재미가 들기 전에. 내가 타인에게 공감을 무례하게 강요하기 전에. 이런 감정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체계화’되어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화되기 전에. 육체의 상처가 시간과 더불어 알아서 치유되는 것처럼, 마음으로 받은 슬픔의 상처도, 저마다 속도는 달라도 반드시 치유되는 날이 옵니다. 슬픔 안에는 미리 단단한 회복력이라는 성분도 함께 들어가 있거든요. 스스로도 도와주세요. 일부러 힘나는 척을 하든, 센 척을 하든 다 좋으니까 뭐라도 긍정적이 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매정한가요? 상실한 그 직후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정신적 공황에 허우적거리며 애도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직한 순리인 것 맞습니다. 이때 심적으로는 미처 그 대상을 못 놔주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우리가 진짜 이별을 고하는 순간은 알고 보면 모든 요란법석이 끝난 후, 그 후에 찾아옵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여분의 감정들이 많이 빠져나온 후, 우연히 어떤 순간,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없음의 무게를 ‘개인적으로’ 직면하고 체감하게 될 때, 지금 머리 터질 것처럼 난무하는 여러 생각들을 그즈음 가서는 찬찬히 되돌아볼 수 있을 때, 아버지와 다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진짜 이별을 고하는 거겠죠. 이런 ‘슬로 굿바이’는 어떨까요.
임경선 칼럼니스트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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