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하다 싶어도 빨간 피가 낭자하고 사람이 퍽퍽 쓰러져 죽는 장면을 보는 건 쉽지 않다. 혼자 보기엔 무시무시한 납량 특집극. 그렇다고 이 두 편의 티브이 공포물을 가족과 함께 보기에도 적절하진 않을 것 같다. <10 아시아> (www.10asia.co.kr)의 백은하 편집장(사진 왼쪽)과 최지은 기자가 무더위 속 한창 방영중인 <혼>(문화방송)과 <2009 전설의 고향>(한국방송)을 들여다봤다.
문화방송 미니시리즈 ‘혼’, ‘M’의 뒤를 이을까?
‘전설의 고향’, 한국형 공포로 클래식이 되길 바라
최지은(이하 최) <혼>은 14년 만에 부활한 납량 특집 미니시리즈다. 주인공 오디션 경쟁률이 1058 대 1이었다. <메리대구공방전>에 나왔던 임주은이 여주인공으로 뽑혔고, 감독과 친분이 있는 이서진이 남자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다층적인 플롯과 인물 구성을 보여주는 미니시리즈 <혼>(문화방송). 문화방송 제공
‘대사발’ 그게 뭐니~
백은하(이하 백) <전설의 고향>(이하 전설)류의 공포물은 여름 특집이라기보다 단막극 느낌이었다. <혼>처럼 본격적으로 긴 스토리 라인을 가진 미니시리즈가 방영되는 건 참 오랜만이다. 〈M〉 방영 당시엔 심은하의 목소리 변조, 눈에서 초록색 레이저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격이었다. 파격적인 컴퓨터 그래픽과 특수효과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으니까. 공포물 제작의 노하우가 좀더 쌓였더라면, 지금 공포물의 수준이 훨씬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최 <혼>은 제작 과정에서 줄거리가 많이 변했다. 큰 줄거리는 한 여고생이 악령에 빙의되면서 괴력을 갖추고, 악인에게 복수한다는 거다. 극 초반 공포에 대한 여러 가지 복선이 깔리고 있다. 가령 주인공 여고생이 어린 시절 사람들이 불타 죽는 걸 보고 생긴 트라우마라든지, 범죄 프로파일러 이서진은 어머니와 누이가 바로 눈앞에서 죽었다든지 하는 식의 장면이 나왔다. 복잡한 사건들이 서로 얽혀 있는데 이 이야기와는 별도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 여자들만 골라서 죽이는 연쇄살인마가 귀신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백 공포라는 건 뭔가 하나씩 촘촘하게 쌓았을 때 확~ 밀려오는 법이다. 그 축적물들이 아직은 어설프고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 귀신이 천장에서 튀어나오고, 여자애가 침대 밑으로 확 빨려들어가는데도 무섭지는 않고 왜 이러나~ 싶었다. 전교회장이 잘사는 집 망나니 아들이라서 악랄하다는 식의 설정은 학교폭력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 같았다.
최 어느 정도는 대본의 문제도 있는 것 같다. 주인공이 쌍둥이고 예쁘게 생긴 엄마는 꽃집을 한다는 설정도 작위적이다. 자전거 타고 꽃배달 가다가 한 남자를 마주치는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죠”라고 말하는 것도 1990년대 이후로는 나오기 힘든 대사 아닌가.
백 현대 공포물에는 학교가 자주 등장한다. <혼>에도 교실이 나온다. 그 밖에 익숙한 공포의 클리셰들이 참 많이 나온다.
최 이번주부터 억울하게 죽은 쌍둥이 여고생이 귀신으로 나타나서 자기를 해한 이들에게 복수를 하고 있다. 대체로 <혼>의 공간과 캐릭터는 너무 비일상적이다. 바이올린 연주하다가 옥상에서 투신하는 장면도 그렇고. 심지어 연주하는 곡은 비탈리의 ‘샤콘’이었다. 슬픈 장면에 너무 자주 사용됐던 곡이라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됐다 싶었는데! 바이올린 연주한 다음에 죽어야 하는 당위성은 뭘까.
백 그래서 사이코패스 이야기가 더 공포스럽게 보였다. 주변에서 실제로 그런 범죄가 일어나고 있으니까. 무덤 속에서 튀어나온 존재보다 현실이 더 무섭다.
최 비현실적인 멋진 장면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강박이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사실 어릴 땐 이미지로 느끼는 공포가 엄청났다.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도 어릴 때 봤던 <전설>에서 국수가 지렁이로 확 변하는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릴 땐 무서운 장면으로 공포를 느끼지만 성인이 되면 그렇지 않다. 이야기가 제대로 짜여 있어야 한다.
백 <혼>의 이미지들은 이야기가 뒷받침 안 되는 상황에서 피가 튀고, 복도에서 귀신이 보고 있기 때문에 공포로 잘 연결이 안 되는 것 같다. 현대의 공포라는 건 사람이 하얀색 분장을 하고 피를 뚝뚝 흘리는 데서 느껴지는 건 아니다.
최 애초 <혼>의 제작진은 기존 납량 특집과 다르게 밤에 나오는 귀신으로 무섭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낮의 밝은 상태에서 무엇인가 슥~ 드러나는 식의 공포를 강조하고 싶었다고 하더라. <혼>에 나오는 빙의, 귀신, 범죄 프로파일러나 법의학 박사 같은 직업은 사실 이 분야 드라마에선 엄청 유행한 아이템이다. <혼> 안에 다 들어 있는데 서로 따로 논다는 게 아쉽다.
달걀귀, 흡혈귀, 가면귀 등 다양한 귀신 이야기로 구성된 <2009 전설의 고향>(한국방송). 한국방송 제공
있을 건 다 있는데 따로 노네
백 시청자들은 이미 미국 드라마를 통해서 각 분야 전문 아이템들을 다 만나본 상태다. <혼>을 보면 연상되는 캐릭터들이 참 많고 자매라는 설정도 <장화홍련>을 떠올리게 한다.
최 <혼>이 뭔가에 집중을 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M〉은 당시 사회적으로 금기시됐던 임신중절이라는 테마를 확 잡고 갔다. 공포물에서도 가장 현재적인 테마, 무엇이 사람들을 무섭게 하고 공동의 죄의식을 건드리는지를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
백 <혼>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여전히 어떤 이야기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회가 거듭할수록 초반에 깔아놓은 단서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재밌어질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전설>은 첫 회 ‘혈귀’ 편에선 김지석의 분장만 보고도 놀랐다. <전설>은 한국방송의 클래식이다. <전설>이 사랑받았던 이유는 굉장히 지역적인 데서 이야기를 찾아내기 때문이었다. 미국적인 공포 영화를 볼 때와는 다르게 무슨 면, 무슨 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라는 구체적인 이야기의 단서가 나온다. <전설>에서는 누구를 시샘하면 벌을 받게 된다, 조강지처 버리면 벌 받는다는 커다란 공포를 심어 주면서 교훈을 남긴다. 공포를 빌미로 한국적 도덕을 각인시켰던 게 <전설>의 또다른 역할이었다.
최 작년 <전설>의 경우엔 한국방송 내부적으로 더 힘을 실어줬고, 시청률도 꽤 잘 나왔다. <드라마시티>가 없어져서 신인 감독이 ‘입봉’할 기회가 없어졌다. 그래서 올해 <전설>엔 신인 감독과 작가들이 지난해보다 많이 투입됐다. 긴축재정의 시기에 단막극을 만든다는 건 힘든 일이다. 사극이라 예산이 더 들어가기 때문에 제작의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백 작년에 부활한 <전설>은 일단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화제가 됐다. 옛날 같으면 무덤이 반으로 쪼개지는 장면이 표주박 뜯어지는 것 같았다면 구미호 털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쓰는 기술적인 변화가 감지된 거다.
최 한데 문제는 어른들이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느냐는 거였다. 옛날 <전설>은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봤는데, 그렇다고 지금 <전설>을 노인과 아이들에게 맞추면 되나 싶었다. <전설>이 공포 드라마로 국민적인 인기를 끌던 시기엔 할머니에게 들었던 옛날이야기가 영상으로 구현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무서웠다. 하지만 20년 사이 우리가 접하는 현실이 놀랄 만큼 변화했다. 작년 <전설>의 ‘구미호’ 편에 약자가 희생되면서 전체 집단을 유지시키는 것이 맞는가 라는 질문이 담겨 있었는데, 이번 ‘혈귀’ 편에서 지아비에 대한 사랑 운운하는 건 전혀 와 닿지 않았다.
백 <전설>을 보면서 왜 지금 한복 입고 상투 튼 귀신을 봐야 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최 화요일에 방송된 ‘죽도의 난’ 편은 정여립의 난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다. 사회 변혁을 꿈꿨던 사람의 죽음과 그걸 둘러싼 이야기는 ‘혈귀’ 편보다 문제의식이 느껴졌다. ‘혈귀’ 편에서 제일 무서웠던 건 남편에게 소박맞은 이영은에게 가해지는 시댁의 폭력이었다. 도자기 깨진 걸 얼굴에 집어던지고, 천장에 매달아서 곤장을 치는 게 어떤 장면보다 무섭더라.
백 옛날엔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밖에서 알 수 없는 시대였다. 사실은 귀신보다 그런 가정사가 공포였을 거다. 월요일 방영된 ‘혈귀’ 편에선 베드신이 적나라하게 나왔다. <전설>은 애들이 부모님과 함께 봤던 프로인데 시청 타깃을 어떻게 잡은 건지 궁금했다. 혼자 보기 무서워서 가족들이 함께 봤던 게 <전설>의 전통이었다면 지금 제작진들은 좀더 성인 버전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이 공동의 죄의식을 건드릴까
최 현재적인 문제의식과 공포심을 연결한다면 <전설>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꼭 저승사자의 등장이 촌스러워서 안 무서운 건 아니니까. 이야기를 어떻게 정교하게 만드는가와 함께 방송사 차원의 관심도 필요하다. 여름용, 방학용으로 제작하는 게 아니라 한국형 공포라는 걸 제대로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기대한다.
백 최근엔 드라마가 주는 공포라는 건 우스운 상황이다. 뉴스 속의 액션이 훨씬 더 정교하고 공포스러운 현실이라는 게 진짜 슬프고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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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그 뻔뻔함이 무섭구려
자전거 | “교복 입은 여고생이 탄 자전거도 그렇거니와, 자전거 타고 꽃배달 가다가 화들짝 놀라는 순간 꽃이 흩뿌려지는 장면이라니. 피 흘리는 귀신보다 더 작위적이고 더 무서웠다.”(백은하)
왕따의 이유 | “엄마가 자기를 낳다가 죽어서 자긴 왕따당해도 싸다고 받아들이는 고등학생의 등장. 정말 너무 부끄러운 설정이었다. 인간 자체에 대한 고민이 너무 없다.”(최지은)
<전설의 고향> ‘혈귀’ 편, 그 민망함이 무섭구려
베드신 남발 | “난데없이 툭툭 등장했던 베드신, 내 옆에 엄마가 없어서 다행이었지.”(최지은)
숫처녀에 대한 집착 | “흡혈귀가 인간이 되려면 숫처녀 아홉명을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 숫처녀에 대한 집착은 굉장했다. 병아리 감별사도 아니고. 공포물이니까 그런가 하고 넘어갔다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백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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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현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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