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문화 적응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올해 서른의 프리랜서입니다. 얼마 전부터 강남에 있는 회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어요. 일주일에 한번은 꼭 직접 만나고, 친해져야 하며, 해외출장도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곳 사장님과 사모님의 태도가 저를 힘들게 합니다. 툭하면 제 옷차림이나 소품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이를테면 “한여름인데 자기 향수가 너무 헤비하다”라든가, “좋은 가방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건데…”, “나랑 친해지면 더 챙겨줄게. 하나 사줄 수도 있고” 하는 식입니다. 전 덩치가 커서 예쁜 옷을 입지도 못하지만 싸더라도 제 방식대로 독특하고 ‘유니크’하게 옷을 입으려고 해요. 명품 가방은 하나도 없고요. 나이가 있어도 프리랜서니까 정장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옷에 관심이 많아 똑같이 하고 간 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 부부는 갑자기 사업이 일어난, 이른바 졸부입니다. 고생했던 시절은 잊은 듯해요. 그들 보기엔 제가 궁상맞고 촌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저는 이게 제 분수와 취향에 맞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솔직히 전 한번도 강남에서 안 살아 봤고, 넉넉해 본 적도 없어서 제 내면의 깊숙한 열등의식이 자극되어 더 힘든 것 같아요. 제가 어떻게 하면 자존심을 지키며 그들이 저에게 상처 입히려 할 때 방어할 수 있을까요? 가난하게 태어나 어릴 때부터 열심히 일했고 지금의 자리를 만든 것에 만족하며 살아왔지만, 이럴 때면 결국 저도 속물이구나 싶어요. 시골처녀가 강남에 당당하게 적응할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A 강남문화 적응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먼저 잠깐 옷 얘기. 브랜드 옷 하나 없어 상대적인 초라함을 느낄 것도, 싸지만 유니크한 차림새라고 더 내면의 인격이 우월해지는 것도 아닐 겁니다. 명품 가방 들었다고 그 인간이 명품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저렴하면서도 좋은 무명 옷을 찾아 헤매보아도 결국 대부분은 몇번 입고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요는 옷은…옷 이상도 옷 이하도 아닙니다. 다 제멋에 겨워 취하는 자기 스타일일 뿐이지요. 고로 특정 스타일이나 그 스타일이 대변하는 가치관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지요. 이건 철저히 ‘일’ 영역의 고민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프리랜서의 차림새는 프라이버시로 존중되어야 할까요? 예, 하지만 일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 권장되는 차림새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의 개성적 취향을 존중받기 이전에 먼저 능동적으로 고객사의 성향과 TPO에 맞추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지요. 그건 굴복이 아니라 성의의 문제이죠. 얼굴 안 보고 납품하는 것으로 일 끝나면 상관없지만 해외출장 가서 ‘한 팀’이 되어 움직일 정도라면 프리랜서니까 당연히 안 입어도 용서받을 거라 생각했던 정장을 입어줄 필요가 있을지도 몰라요.
차림새에 대한 지적이 나의 총체적인 가난과 소박함과 열심히 살려고 하는 의지를 조롱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것은 내 마음이 상처받도록 허락하는 일입니다. 근본적인 지향점이 다른 사람을 고객이나 상사로 만나게 되었다면 ‘마음’은 버리고 오로지 ‘머리’만 사용하기로 해요. ‘머리’를 사용하는 것은 고객이 나를 더욱 마음에 들도록 머리 쓰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건 소신을 내다버린 비굴함이 아니라 단순히 커리어와 관련한 인간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우선, 너무나 기본이지만, 내 일 실력에 대해선 그 어떤 잔소리도 나오지 못하게 일 하나는 무조건 제대로 잘해야 합니다. 일에 있어선 한 치의 틈을 보이지 말아야 다른 영역의 자율성이 더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들이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는 것은 거꾸로 당신의 무언가가 먼저 그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놓치지 마세요. 그들이 세련되지 못해서 돌려 말하는 걸 수도 있어요. 셋째, 당신과 같이 일하기로 결정한 그들이 악의를 가지고 당신을 비웃고 상처 주려고 했다고 생각 말고 ‘독고다이’로 일하는 프리랜서라면 이런 기회에 한번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키고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은 개인의 자신감을 보존하기 위한 말이지만 이것이 녹이 슬면 ‘그래 나 원래 이래, 배째’ 식의 자기고집이 될 우려가 있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사실 ‘있는 그대로의 나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노력하는 나’를 일컬어야 하겠지요? 넷째, 사장 부부의 취향을 이해하고 맞춰주는 것이 얼마나 나의 프리랜스 일에 영향을 끼칠지, 얼마큼 내 식대로 버틸 수 있는지 그 적정 타협 지점을 냉철히 가늠해보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지점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노력과 비용을 산출해보고 스스로 납득할 정도로만 먼저 투자해보십시오. 아웃렛 세일할 때 가서 가장 저렴한 명품브랜드 가방 하나 건져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잘 살펴보면 ‘립서비스’만으로도 ‘퉁칠 수’ 있는 정황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쪼록 힘있는 부자가 힘없는 가난한 자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통제하려 드는 것은 부당한가라는 자괴적인 담론으로 스스로를 몰고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범한 자급자족 서른살의 벌이로는 명품브랜드 도배는 어차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열등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가능했다면 당신이 지금 그 ‘사장’ 자리에 앉아 있어야죠. 이것은 그러니까 당신이 강남문화에 저항하면서 인정투쟁을 하거나 속물처럼 적응하는 문제가 아닌, 돈에 대한 결핍이 없어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는 ‘인정욕구’를 어떻게 적절히 구슬리고 요리하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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