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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사주에 안 좋대요” “서태지가 좋아”…개명한 사람들의 갖가지 사연들
“사주에 안 좋대요” “서태지가 좋아”…개명한 사람들의 갖가지 사연들
퀴즈 하나 풀어봅시다. 지난 10년간 한국인 70명 중 1명은 이름을 바꿨습니다. 73만명이 개명을 한 것이지요. 10년 전 개명 신청자는 3만여명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엔 17만명이 넘습니다. 2005년 대법원이 범죄 은폐 등 불순한 의도가 없다면 원칙적으로 개명을 허가해야 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요즘 이름을 바꾸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히는 것은 무엇일까요?
① 촌스럽거나 놀림감이 돼서 ② 출생신고서에 잘못 써서 ③ 범죄자, 악명 높은 이름과 같아서 ④ 성명학상 좋지 않아서
답은 ④. 개명을 허가해주는 법원이나 유명 작명가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사고나 사업 실패 등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작명소·철학원 등의 권유로 개명을 신청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위에 열거한 다른 예들도 이름을 바꾸려는 이유들입니다. 개명 허가율이 90%에 이른다고 하지만, 짧게는 몇년 길게는 수십년간 불려온 이름을 바꾸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esc〉가 이름을 바꾼 사람들을 찾아 속내를 들여다봤습니다.
백민서(32)씨는 지난해 이름을 바꿨다. 원래 이름은 수인이었다. 얼핏 괜찮은 이름 같지만 성을 붙여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백수’라는 별명이 생겼다. 사실, 별명에 큰 신경을 쓰진 않았지만 새로운 일을 모색할 무렵 철학원에서 사주를 봤더니 이름이 별로 좋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결국 ‘별명 때문에 힘들다’며 개명신청서를 써 법원에 제출했다. 이름을 바꾼 뒤 딱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주에 좋다니까 안심이 된다. 지난해부터 새로 만난 사람들은 그를 민서로 부르고 예전 친구들은 계속 수인으로 부른다. 이름이 두 개가 된 셈이다.
백민서씨의 아내인 정주연(33)씨도 철학원에서 이름 중 ‘주’ 자 한자가 좋지 않다며 바꾸라는 권유를 받고 개명에 도전했다. 딱히 내세울 만한 사유가 없어 ‘되는 일이 없다’고 호소했지만 기각당했다.
징크스에 민감한 스포츠 스타들에게 이름은 인생에서 큰 의미다. 롯데 자이언츠 간판스타로 떠오른 손아섭은 2008년 시즌까지 손광민이었다. 작명소에서 ‘야구 잘하는 이름’이라며 지어준 아섭으로 이름을 바꾸고 난 뒤 펄펄 날고 있다. 박동희 야구전문 칼럼니스트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은 닉네임이나 가명을 유니폼에 쓸 수 있는데 우리의 경우 주민등록상 이름만 표시하게 돼 있어 아예 개명을 신청한 경우”라며 “손아섭의 성공 여파가 워낙 커 고교야구 1·2학년 선수들 몇명이 이름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손아섭 선수처럼 개명 뒤 좋은 일만 생기는 건 아니다. 사시 준비생인 김아무개(28)씨는 ‘시험에 붙는 이름으로 바꾸라’는 역술인의 말을 들었다. 고심 끝에 남자 같은 이름으로 바꿨지만 결국 낙방했다.
작명소마다 좋다는 이름이 다 달라 어떤 것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고교 시절 이름을 바꾼 김아무개(30)씨는 “어떤 분은 작명소에서 받은 이름들을 6개월 정도 직장이나 집에서 사용해본 뒤 개명신청을 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대법원이 올 초 발간한 <역사 속의 사법부>를 보면 개명에 성공한 ‘기가 막힌’ 이름들이 여럿 등장한다. 서동개·소총각·경운기·신기해·이몽치·김치국·송아지·권분필·임신·오보이·지기미·정쌍점·윤돌악…. 특히 ‘촌스러운’ 이름에서 벗어나려는 중년층들의 개명신청도 늘고 있다.
20여년간 무료 작명을 해 왔던 서초구청 이동우 오케이민원센터장은 “40~50대 주부들도 개명을 많이 한다”며 “50대 후반인 ‘지자’라는 여자분은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부를 때 항상 웃는다며 개명 결심을 하더라”고 전했다. 서울에서 개명을 담당했던 한 판사는 올해 자신과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의 개명을 허가해주었다. 개명 사유는 ‘봉’ 자가 들어간 이름이 ‘촌스러워서’였다.
개명 용기까지 못 내는 ‘자’ 자나 ‘순’ 자 돌림 이름의 50대 여성 중에는 친구들끼리 혹은 자매들끼리 세련된 이름을 정해 서로 불러주는 경우도 있다. 정숙자(57)씨를 비롯한 정씨 집안 네 자매가 그렇다. 장녀 연자씨는 연지, 숙자씨는 수지, 희순씨는 희수, 희자씨는 희지로 정하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10대 소녀들처럼 ‘까르르’ 웃는다. “요새 애들이 쓰는 예쁜 이름이 부럽죠. 굳이 이름을 바꾸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세련된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지 않겠어요?”(정숙자씨)
우락부락한 남자인데 이름은 아주 여성스럽다면? 사람의 이미지와 이름이 서로 어울리지 않을 때가 간혹 있다. 대학생 송찬우(22)씨는 지난해 이름을 바꿨다. 원래 이름은 송우람이었다. 먼저 개명을 한 어머니가 이름이 좋지 않다며 개명을 권유했지만 사실 찬우씨의 마음을 움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우람은 덩치가 크고 단단한 이미지인데, 전 마른 편이에요. ‘어, 우람하지 않네’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남들은 농담처럼 하는 말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제 입장은 안 그렇더라고요.”
서울시 7개구 개명신청을 관할하는 서울가정법원의 김대휘 법원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개명허가 건으로 박대수(가명)씨가 박대수서태지씨가 된 경우를 꼽았다. 서태지를 너무 좋아해, 이름을 변경해주면 병이 나을 수 있을 거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 법원장은 환경운동가 두 명이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반대하기 위해 이름을 ‘사대강’으로 바꾸겠다며 낸 개명신청은 기각했다.
빨리 개명하려 주민등록도 옮겨?
이름을 바꾼 사람들 중에는 새 이름에 적응을 못하거나, 효과를 못 본다는 이유로 재개명을 결심하기도 한다. 법원에선 개명을 결정할 때 신중할 것을 조언했다. 재개명 허가심사는 처음 개명 때보다 훨씬 엄격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는 개명성공 100%나 기각 땐 환불 100% 등의 홍보 문구를 내걸고 서류처리를 대행해주는 법률사무소도 많다. 또 법원별 개명허가 성향을 분석한 자료도 떠돈다. 개명을 빨리 허가받기 위한 편법도 등장했다. 김대휘 법원장은 “진행이 빠르다고 여겨지는 기관에서 개명허가를 받기 위해 주민등록을 일시 이전하는 경우가 있다”며 “주민등록법 위반이 될 가능성도 높고 서류심사 때 (예전 주민등록) 관할 법원으로 돌려보내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개명을 허가받은 뒤에도 여러가지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힘들게 얻은 새 이름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구청에 들러 개명허가 사실을 신고하고, 새 주민등록증 신청 및 통장 명의변경 등이 필요하다. 인터넷 사이트의 경우, 먼저 신용정보 사이트에 들어가 실명 데이터베이스(DB) 정정을 한 뒤 각 사이트가 정해놓은 절차에 따라 명의를 변경해야 한다. “자주 안 가는 사이트는 깔끔히 탈퇴했지만 제 개인자료가 쌓여 있는 네이버 블로그나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명의를 바꿨어요. 그런데 달력일정 관리같이 사소한 서비스에는 옛날 이름이 계속 나오기도 하죠.”(송찬우씨)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름을 자꾸 바꾸려는 덴 또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동국대 사회교육원 김동완 교수는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철학관 이곳저곳을 떠돌며 이름을 계속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람이 이름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름에 저당 잡히는 건 문제죠. 그런데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고도 잘되는 경우를 많이 보잖아요. 노력해서 일이 잘되면 왜 이름을 많이 바꾸겠어요.”
삶이 점점 더 팍팍해지니 하루하루 웃음도 줄어든다. 그러니 이름 하나 바꿔서 한바탕 웃을 수 있다면 어찌 말리랴.
글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윤운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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