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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이미지로 샤워를 하다

등록 2010-12-02 14:54수정 2010-12-04 17:45

‘현지사진의 집’. 사진은 1950~60년대 영국의 쓰레기통을 찍은 것이다.
‘현지사진의 집’. 사진은 1950~60년대 영국의 쓰레기통을 찍은 것이다.
[매거진 esc] 영국 최대 사진 축제 ‘브라이튼 포토 비엔날레’ 참관기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이 사람들은 뭐지?’ 차창 너머로 반바지와 반팔 차림의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내달리고 있었다. 11월에 비를 맞으며 달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라니. 브라이튼은 기묘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안내자 정갑식씨는 “11월11일은 영국의 현충일이라 이를 기념하는 마라톤 대회가 열린 모양”이라고 말했다. 버스는 마라톤 선수들을 지나 브라이튼 포토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로열 퍼빌리언 앞 광장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브라이튼 포토 비엔날레는 영국의 휴양도시 브라이튼에서 10월2일부터 5주 동안 열리는 사진 축제로, 올해로 14회를 맞았다. 2008년 전세계에서 5만8000명이 찾은 영국의 대표적인 사진 축제로 올해는 사진가 마틴 파가 큐레이터를 맡아 관심을 모았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는 ‘새로운 사진’(New Document)으로 사진 형식과 내용의 대안 제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브라이튼 포토 프린지’.
‘브라이튼 포토 프린지’.

처음 찾은 전시장은 ‘낯섦과 익숙함: 브라이튼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Strange & Familiar: Three Views of Brighton)이었다. 알렉 소스(Alec Soth, 미국), 스티븐 길(Stephen Gill, 영국), 가와우치 린코(일본) 3명의 사진가가 브라이튼을 각자의 시선으로 담은 사진전이었다.

알렉 소스는 자신이 찍은 사진과, 딸의 그림과 글을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분홍색 방에 브라이튼의 일상을 주관적인 시선으로 담은 사진이 액자 없이 압정에 박혀 걸려 있었다. 이런 형태의 전시는 다른 전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초로 모든 사진들을 액자 없이 압정에 박아 전시하고 있다.” 안내책자를 살펴봤더니 마틴 파의 글이 실려 있었다. ‘세계 최초’라는 말은 신뢰가 가지 않지만 확인할 도리가 없으니 마틴 파의 말을 믿을밖에.

압정으로 박아둔 사진, 액자는 없었다

영국에서 최근 주목받는 사진가인 스티븐 길의 작품은 난해했다. 중형 필름카메라 반사거울 앞에 조그만 물체를 붙이고 사진을 찍었다. 세상에, 개미도 붙여놨다. 작업 노트에 “문학적인 접근 방법으로 브라이튼의 내재된 속성을 끌어내려 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문학적인 접근 방법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개미가 문학적이라는 뜻인가?


사진가 리사 바너드(Lisa Barnard)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얼굴사진을 변형했다.
사진가 리사 바너드(Lisa Barnard)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얼굴사진을 변형했다.

브라이튼을 찍은 가와우치의 사진은 ‘여기가 일본인가’ 싶을 정도로 일본 색채가 가득했다. 이 전시는 브라이튼의 봄과 겨울을 주제로, 봄은 브라이튼 시내 풍경을, 겨울은 해변 풍경을 담고 있었다. 따스한 색감에 무심한 듯한 앵글은 영국의 낯선 도시에 동양적 색채를 덧씌웠다. 만약 가와우치가 “도쿄데스”(도쿄입니다)라고 한다면 “소데스네”(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여야 할 정도였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현지사진의 집’(The House of Vernacular)이었다. 이번 행사의 큐레이터인 사진가 마틴 파의 색깔이 물씬 풍기는 전시였다. 마틴 파의 사진은 없었지만 사진의 선택, 구성, 배치 등이 영락없이 마틴 파의 것이었다. 마틴 파가 곳곳의 갤러리에서 수집한 사진들을 재배치한 것으로, 마틴 파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사진전이었다. 전시장 7곳에는 브라질에서 모은 증명사진을 재배치한 작품부터 아프리카 독재자의 호화 비행기 내부 사진을 모은 것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걸렸다. 사진의 색감과 앵글은 우리의 오래된 결혼사진, 돌사진처럼 고색창연했고 조악했다.

상업사진가(Lee To Sang)가 찍은 어린이 사진.
상업사진가(Lee To Sang)가 찍은 어린이 사진.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폐건물을 개조한 ‘새로운 시선’(New Ways of Looking) 전시장이었다. 브라이튼 포토 비엔날레의 주전시장으로 상업사진의 문법을 차용한 독특한 색감의 다큐멘터리 사진, 개념미술의 방법을 이용해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인물사진 등 다양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브라이튼 담아낸 3인3색 새로운 시선

네덜란드 태생으로 케냐에서 자란 비비안 사선이 아프리카에서 찍은 인물사진 작업은 색감이나 접근법에서 인상적이었다. 패션사진을 찍었던 이력 덕분인지 그의 작업은 기존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미묘하게 비틀어 새롭게 표현하고 있었다.(www.vivianesassen.com, www.motivegallery.nl 참조)

인도의 젊은(진짜 젊다. 아니 정확하게는 어리다. 26살이다.) 사진가 드루브 말호트라의 <노숙자들>(Sleepers)은 인도의 노숙자 문제를 다룬 사진이었다. 노숙자들을 찍은 사진이 ‘뭐 새로울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형식과 내용 면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작품을 완성한 것을 보면 26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www.dhruvmalhotra.com 참조)

지하에서부터 2층까지 관람을 하고 나니 마치 사진 이미지로 샤워를 한 기분이 들었다. 차갑게 쏟아지는 것들부터 뜨겁게 몸을 감싸는 사진들까지 몸을 관통하는 이미지의 성찬이 눈과 머리를 상쾌하게 했다.

수잰 옵턴(Suzanne Opton)의 ‘많은 전쟁’ 연작 중 하나.
수잰 옵턴(Suzanne Opton)의 ‘많은 전쟁’ 연작 중 하나.

전시장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하자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브라이튼에서의 짧지만 긴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브라이튼 포토 비엔날레는 새로운 시도가 돋보였던, 시민들이 함께하는 사진전이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하루, 그것도 행사 마지막날 둘러본 것을 두고 일반화하는 것은 과한 듯하다.

하지만 관람객들이 쉽게 사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큐레이터인 마틴 파와 사진가의 대담 영상을 전시장 한편에 마련한 점, 전시장을 사진 형식에 맞게 비행기 내부 모양으로 변형한 점 등 관람객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돋보였다.

브라이튼 포토 비엔날레는 아기자기하면서도 ‘새로운 사진’에 대한 고민이 담긴 사진전이었다. 큐레이터인 사진가 마틴 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브라이튼=글·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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