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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릿 조핸슨’에 홀려 쪽박 찰 뻔

등록 2010-12-30 14:46수정 2011-01-01 09:25

1.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의 쇼핑가 리젠트 거리의 밤 풍경. (김형렬 제공)
1.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의 쇼핑가 리젠트 거리의 밤 풍경. (김형렬 제공)
[매거진 esc] 김형렬의 ‘좌충우돌’ 트래블 기어
“이얍~” 런던 유흥가 뒷골목에서 태권도 한 사연

삼십 중반을 지날 즈음, 집 떠나서 딱 삼일만 지나면 허기가 졌다. 일주일 걸려도 다 못 본다는 박물관, 500년 된 작품을 소장했다는 미술관, 무슨 로열패밀리가 살고 있다는 으리으리 궁전, 지상 최대의 폭포, 이런 것들이 다 시들해졌다. “내가 드디어 여행과 이별해야 하는 때구나!” 아, 세상을 혼자 느껴서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도다. 마음이 서늘해지는 순간 남자의 가슴에 다가오는 것. 바로 로맨스 아니었던가!

런던의 11월 날씨는 차갑고 싸늘하다. 4시만 넘어서면 어두워진다. 밤이 시작되면 네온사인과 가로등과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뒤섞인다. 이때쯤이면 ‘피커딜리 서커스’에서 ‘리젠트 스트리트’를 따라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이르는 길은 벌써부터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부르는 장식과 캐럴이 쇼윈도를 장악해간다. 줄리아 로버츠가 들락거린 그 모퉁이 책방 ‘노팅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얘기만 모아놓은 ‘러브 액츄얼리’, 그렇고 그런 애정행각의 반복 속에 옛사랑을 되찾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런던에만 가면 어디선가 근사한 로맨스가 기다리고 있을 듯한 여운을 남긴다는 것.

영화 장면을 떠올리며 혼자 걷는 웨스트엔드에는 비가 오락가락했다. 펍들이 펼쳐놓은 거리 테이블에선 손님들이 떠들고 웃고 난리들이다. 슬쩍 들여다본 홀 안 ‘엘시디 티브이’에는 프리미어리그가 한창이다. 혹시 ‘팍 지쑹 얘기라도?’ 괜한 상상을 하다가 돌아서는데, 길 건너편 쪽의 분홍빛 형광등이 눈에 들어왔다. ‘Pink Earth.’


웨스트엔드 한 극장의 뮤지컬 ‘캣츠’ 공연 장면. (김형렬 제공)
웨스트엔드 한 극장의 뮤지컬 ‘캣츠’ 공연 장면. (김형렬 제공)
그 앞에 금발의 언니가 서 있다. 탱크탑이네. 급 구미가 쏠린다. 왠지 분위기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칼릿 조핸슨 같다. 발걸음도 가볍게 건너가니 언니가 나에게 무언가를 건네준다. “너 여기서 일해?” “응.” 이 친구 눈을 보니 스칼릿 조핸슨이 틀림없다. 건네준 것을 찬찬히 보니, ‘우리 가게에는 커버차지(기본요금)라는 게 없다’는 데 밑줄 쫘악! 하지만 나의 외국여행 철칙 중 하나가, ‘미끼는 따라가지 않는다!’인데….

상상 속 그림들이 눈앞에서 왔다리 갔다리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지하 1층 문을 열고 들어서자 뚱보 흑인 아줌마가 눈인사를 건넸는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릿 오하라의 코르셋 입는 것을 도와주던 마음씨 좋은 흑인 하녀처럼 생겼다. 급한 마음에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문 하나를 더 열고 들어섰다. 제법 넓은 홀 안에 둥근 테이블들이 제법 있고, 몇 좌석엔 손님들도 보인다. 모두 나처럼 혼자 왔나봐. 스타일은 서울의 단란주점 비슷하나 싸구려 같아 보이는 분위기.

그 금발 언니가 메뉴를 갖다 준다. 맥주 한병을 주문하니 자기도 한병 사달란다. 런던 물가가 비싸긴 해도 그 정도는 가능하지. 맥주 두병을 들고 옆자리에 앉는다. 호구조사 시작해야지. “어디서 왔어?” 그녀가 먼저 묻는다. “함 맞혀봐?” “코리아?” 어쭈, 단번에 맞히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서울에서 살았거든.” “어, 그래? 영어 가르쳤어?” “아니, 아는 사람이 있어서 거기서 두달 정도 지냈어.” 이 친구 얼굴이 작다. 몸매도 아담하다. 금발이고, 드러난 어깨가 하얗다. 스칼릿 조핸슨을 만나긴 만났어. 잠시 생각하더니,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를 더듬거린다. 어, 내가 지금 드디어 영화를 찍는구나. 달아올라, 10분 만에 한병을 비웠다. 나보다 먼저 병을 비워버린 그녀가 한병 더 하겠단다. 마다할 수 없다. 아니 마다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가.


웨스트엔드의 명소 ‘피커딜리 서커스’.(김형렬 제공)
웨스트엔드의 명소 ‘피커딜리 서커스’.(김형렬 제공)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더니 두번째 병을 가져온 그녀. 병을 따더니 뭘 불쑥 내민다. “계산서 나왔어.” 갑자기 뒤통수가 뜨뜻해졌다. “이게 뭐야? 여기 0 하나 잘못 붙은 거지?” “아냐 맞아. 500파운드가 네가 내야 할 돈이야.” “무슨 소리? 너랑 맥주 3병밖에 안 마셨는데. 여기 커버차지 없잖아?” “응, 없어. 근데 450파운드는 나하고 인터뷰한 비용이야!” “인터뷰?”


스칼릿 조핸슨은 사기꾼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현찰 50파운드 이상은 절대 낼 수 없다고 했고, 사기꾼이 된 그녀는 신용카드로라도 계산하라고 윽박질렀다. 입구에서 눈인사를 했던 그 흑인 하녀가 왔다. 나를 좀 보잔다. 따로 보자는 사람치고 겁나는 사람 없다. 처음 들어왔던 문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사기꾼 스칼릿도 따라왔다. 이 두 여자, 갑자기 내 몸을 더듬기 시작한다. 주머니의 지갑을 타깃으로 흑녀와 백녀의 보디 공격! “돈 터치! 돈 터치, 마이 보디!”

여느 때라면 기뻐했어야(?) 할 두 여우의 손끝을 사지를 총동원해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찰나, 또다른 덩치가 등장했다. 2m는 족히 돼 보이는 프랑켄슈타인이다. 서부극에서 나오는, 박차가 달린 부츠를 신고 별이 그려진 검은 가죽 점퍼를 입었다. 얼굴 한쪽에 칼로 그은 듯한 흉터까지. 하녀와 가짜 스칼릿이 뒷짐을 지고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내 앞에 섰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해진다. 무엇을 할 것인가? 돈을 줘야 하나? 총이라도 나오면 어쩌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전의를 상실해가는 걸 느끼면서도 프랑켄슈타인이 지키고 선 계단 위쪽을 쳐다보았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마지막 남은 방법이다. 태권도 팔계 일장을 시작했다. “이얍!” 소리와 함께 주먹을 허공에 내지르고, 발길질도 해댔다. 반은 울부짖는 소리로 기합을 넣었다. “이놈들아! 나 좀 풀어줘!” 소리를 꽥 질렀다. 흑인 하녀, 사기꾼 스칼릿 조핸슨, 프랑켄슈타인이 멈칫하며 한발짝 물러난다. 가만히 보니 이 프랑켄슈타인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말도 못 알아듣고 태권도도 모르는, 덩치만 큰 풀빵이었다. 마침내 하녀가 “그를 놔줘!”라고 소리치자, 프랑켄슈타인은 눈을 껌벅거리며 비켜섰다.


김형렬의 ‘좌충우돌’ 트래블 기어
김형렬의 ‘좌충우돌’ 트래블 기어
나는 한달음에 계단을 올라왔다. 밖에 나와 숨을 몰아쉬며 반쯤 내려진 셔터를 발로 걷어찼다. 갑자기 그 50파운드도 아까운 생각이 들어 떠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경찰 둘이 다가왔다. 자초지종을 듣더니 익숙한 상황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꼬깃꼬깃한 지폐 50파운드 돌려주면서 경찰은 이쪽보다 저쪽이라며 축구 중계중인 건너편 펍을 가리켰다. 그래, 스칼릿 조핸슨이 아무 때나 오나? 아무래도 런던 로맨스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김형렬 호텔자바 이사 www.hoteljav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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