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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무릇 메밀 같아야

등록 2011-02-17 11:11

냉면
냉면
[매거진 esc]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따르릉, 따르릉.” 손전화가 울렸다. “선배, 어디신지요? 출출하면 오세요.” 후배 ㄱ의 전화였다. 기특하기도 하지! 강원도 인제에서 올라온 것을 어찌 알고 전화를 했는지! 힘겨운 노동을 끝낸 사람에게는 따끈한 방과 지친 심신을 위로해줄 맛깔스러운 음식이 제일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후배가 부른 술자리에는 낯선 이들이 많았다. 변호사 ㄱ과 법조출입기자를 했던 ㄱ, 법조출입기자가 될지도 모르는 후배 ㅂ, 다른 신문사 법조출입기자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법이다. 이들이 유명한 변호사 ㄱ을 만나는 일은 일의 연속선상에 있다.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 내가 달려간 이유는 오로지 온돌방의 온기와 우리 음식 때문이다. 번잡한 종로통 한가운데에 있는 ‘시골집’은 맛도 맛이지만 방바닥이 훌륭하다. 앉아 있노라면 서서히 보온병 같은 온기가 방바닥에서 올라온다. 젓가락을 대기도 전에 기분이 달아오른다.

낯선 이들과의 술자리는 정맥과 동맥이 파르르 떨게 하는 긴장감이 있다. 몇 초간 오고 가는 눈빛에서 상대방의 품성과 철학을 읽어내야 한다. 관심분야를 파악하고 적당히 내 생각도 이야기해야 한다. 친해질 요량으로 우스운 농담 하나 던졌다가 싸늘한 반응이 돌아오면 목 디스크가 재발한 느낌이 든다. 식탁 위에 메밀묵과 술국이 없었다면 스트레스 때문에 뛰쳐나갔을 것이다.

음식은 사람을 이어주는 단단한 동아줄이다. 이 집의 메밀묵은 육수가 잘박하게 들어가서 마치 국 같다. 김 가루, 신 김치, 볶은 고기와 약간의 양념만으로 맛을 냈다. 노인들을 위한 ‘저녁식사’ 같다. 씹기도 전에 부서진다.

메밀은 예부터 우리 식재료로 요긴하게 쓰였다. 냉면(사진)도 메밀이 주재료다. 예전 서울사람들은 만두피 재료로 메밀가루를 쓰기도 했다. 메밀은 밀가루보다 점성이 약해 피로 만들면 터지기가 쉽다. 만드는 데도 고난도의 실력이 필요하고 먹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그 옛날 양반네들은 메밀가루 만두를 먹는 모양새로 그 사람의 품위를 가늠하기도 했다고 한다. 메밀로 만든 과자도 있다. 메밀산자는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반씩 섞어 튀긴 뒤 꿀에 절였다가 고물을 묻혀 낸 것이다. 메밀로 만든 음식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지도 허하지도 않다. 친구는 무릇 이런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날 ‘시골집’을 나와 늦은 밤 두번째로 찾은 곳은 ‘평화만들기’라는 술집이었다. 이곳도 안주보다는 술집의 공기를 가득 메운 그윽한 음악이 훌륭하다. 원로가수 백설희의 노래 ‘봄날은 간다’의 화려한 변신은 삼지창이 박혀 뚫린 심장에서 선홍색 피가 뚝뚝 떨어지고, 폭이 1㎝도 안 되는 가는 칼로 쭉쭉 살가죽을 찢는 애잔함을 선사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백설희가 한 곡조 뽑고 나면 이어 조용필, 장사익, 한영애 등 14명의 가수들이 자신들만의 색깔로 ‘봄날은 간다’를 부른다. 가사와 박자는 같은데 완전히 다른 노래다. 주인장이 이 노래들을 모아 한 장의 시디로 만들었다. 맛집이든 술집이든 때로 주메뉴보다 반찬이 그 집을 살려주기도 한다. (‘시골집’ 02-734-0525/‘평화만들기’ 02-733-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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