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슬기와 민의 리스트 마니아
‘레디메이드’로 유명한 현대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은, 생전에 ‘얇음보다 얇은’(infrathin)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두 사물 또는 사건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이해된다. 그러나 뒤샹에 따르면 ‘얇음보다 얇은’은 정의할 수 없으며, 오직 보기만을 제시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가 내놓은 몇몇 보기.
● 어떤 물건과 1초 뒤의 그 물건.
● 하나의 평평한 표면을 다른 평평한 표면에 겹칠 때 지나치는 순간들.
● 사람이 앉았다가 방금 일어난 자동차 좌석의 온기.
● 닫히기 직전 마지막으로 사람이 통과한 지하철 문.
● 벨벳 바지를 입은 사람이 걸을 때, 두 다리가 서로 스치며 나는 소리.
● 담배 연기 냄새에 섞인 흡연자의 입냄새.
● 총을 쏠 때 나는 폭발음과 그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목표를 통과하며 남긴 구멍.
● 같은 거푸집에서 찍어낸 두 주물. 우리는 뒤샹의 ‘얇음보다 얇은’에 뒤늦게 호응하며 ‘두꺼움보다 두꺼운’(ultrathick)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싶다. 아마도 한눈에 구별되는 두 사물 또는 사건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가리키는 말로 쓸 수 있을 테지만, ‘두꺼움보다 두꺼운’ 역시 정의하기는 어렵고, 오직 보기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다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몇몇 보기. ● 어떤 물건과 같은 순간의 다른 물건. ● 평평한 판재 둘을 모서리끼리 맞붙일 때 쓰이는 베이킹 소다와 순간접착제 혼합물. ● 사람이 앉지 않아도 늘 뜨끈하게 히터를 켜 놓은 자동차 좌석. ● 닫히는 순간 마지막으로 통과하려던 사람에 걸려 다시 열린 지하철 문. ● 벨벳이건 아니건, 바지를 입은 사람이 걸을 때 엉덩이 사이에 바지가 끼어들어 생기는 형상. ● 흡연자의 입냄새. ● 어르신들의 친목 골프 경기에서, ‘나이스 샷!’과 텅 빈 홀. ● 라면 또는 카레 봉지의 조리 예. ● 인스턴트 크림수프에서 제대로 풀리지 않아 작게 뭉친 가루 덩어리, 맛동산이나 조리퐁에서 단물이 엉켜 변형된 과자 조각, 요플레를 열었을 때 뚜껑에 엉겨 붙은 크림. ● 자비스 코커가 지적한 대로, 초기 <톰과 제리>와 두 미물이 서로 대화를 하기 시작하는 후기 <톰과 제리>. ● 극장에서: “오빠, <다이 하드>가 무슨 뜻이야?” “바보냐? ‘죽은 심장’이라는 뜻이야.” ● 서울의 테헤란로와 테헤란의 서울로. ● 청기와주유소와 청기와장례식장과 청기와웨딩홀과 청기와뼈다귀해장국. ●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 최슬기·최성민/ 그래픽디자이너 듀오
● 같은 거푸집에서 찍어낸 두 주물. 우리는 뒤샹의 ‘얇음보다 얇은’에 뒤늦게 호응하며 ‘두꺼움보다 두꺼운’(ultrathick)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싶다. 아마도 한눈에 구별되는 두 사물 또는 사건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가리키는 말로 쓸 수 있을 테지만, ‘두꺼움보다 두꺼운’ 역시 정의하기는 어렵고, 오직 보기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다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몇몇 보기. ● 어떤 물건과 같은 순간의 다른 물건. ● 평평한 판재 둘을 모서리끼리 맞붙일 때 쓰이는 베이킹 소다와 순간접착제 혼합물. ● 사람이 앉지 않아도 늘 뜨끈하게 히터를 켜 놓은 자동차 좌석. ● 닫히는 순간 마지막으로 통과하려던 사람에 걸려 다시 열린 지하철 문. ● 벨벳이건 아니건, 바지를 입은 사람이 걸을 때 엉덩이 사이에 바지가 끼어들어 생기는 형상. ● 흡연자의 입냄새. ● 어르신들의 친목 골프 경기에서, ‘나이스 샷!’과 텅 빈 홀. ● 라면 또는 카레 봉지의 조리 예. ● 인스턴트 크림수프에서 제대로 풀리지 않아 작게 뭉친 가루 덩어리, 맛동산이나 조리퐁에서 단물이 엉켜 변형된 과자 조각, 요플레를 열었을 때 뚜껑에 엉겨 붙은 크림. ● 자비스 코커가 지적한 대로, 초기 <톰과 제리>와 두 미물이 서로 대화를 하기 시작하는 후기 <톰과 제리>. ● 극장에서: “오빠, <다이 하드>가 무슨 뜻이야?” “바보냐? ‘죽은 심장’이라는 뜻이야.” ● 서울의 테헤란로와 테헤란의 서울로. ● 청기와주유소와 청기와장례식장과 청기와웨딩홀과 청기와뼈다귀해장국. ●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 최슬기·최성민/ 그래픽디자이너 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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