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원샷! 하고 마셔버리고 싶을 정돕니다. 하늘빛이 맑은 소주 한잔처럼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입니다. 서울 공덕동 어딘가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아, 산뜻한 반주 한잔 하지 않은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적당히 선선하고 바람도 딱 가을의 그것입니다. 지금쯤 가을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자판 다다다닥 마우스 클릭클릭 전화벨 띠리리리 소리만 들리는 편집국에 앉아 생각합니다. 이제 지난밤 음주의 흔적도 머릿속에서 사라졌고 슬슬 esc 제작에 피치를 올려야 할 때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스테이 헝그리, 스테이 풀리시’를 곱씹어 봅니다. 미련스러워 보일 정도로 묵묵하고 우직한, 그리고 굶주린 이가 끼니를 바라듯 열망하는 삶의 태도를 이른 것일 테죠. 문득 배고픈 소크라테스도 떠올랐습니다. 배부른 돼지들에게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얼마나 바보처럼 보였을까요. 지쳐버렸다면 소크라테스는 없었겠죠.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을 이끌어준 헝그리 정신도 있죠. 물론 헝그리한 태도가 핵심이지 밥이라는 목표가 중요한 건 아닐 겁니다. 스티브 잡스의 궂긴 소식을 접한 다음날 우연히 집어든 책이 장선우 감독의 소설 였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장 감독의 소설에는 끊임없이 부처의 가르침이 등장하고,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가득했습니다. 일백여덟가지 번뇌 속에서도 헝그리하게 바보처럼 삶을 이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기묘한 감동을 줬습니다.
가을에 들어서며 달리기, 등산, 낚시 등을 해야겠다거나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네요. 그래서 다시 ‘스테이 헝그리, 스테이 풀리시’를 되뇝니다.
김진철 팀장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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