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지상 최악의 소년’. 인터넷 갈무리
[매거진 esc] 진지하게, 코믹하게 ‘종말’을 즐기는 문학, 웹툰, 애니들
지구 종말, 인류 멸망이라는 소재. 수많은 창작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줄 만한 소재이다. 오지 않은, (아마도) 오지 않을 그날을 머릿속에서 마음껏 상상한다는 건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다. 종말론 창작물, 상상만으로 우울하다. 그러나 훌륭하신 창작 예술가님들, 우울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배꼽 빠지도록 웃긴 단막 애니메이션과 웹툰은 종말론 창작물의 지평을 확 넓혀준다.
웹툰 <지상 최악의 소년>. 종말을 소재로 삼은 것답게 설정은 황당하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나는 불행하다>에서 우승한 등장인물 이현. 우승 선물은 신이 소원을 들어주는 것. 그런데 그 소원이 ‘지구 종말’이란다. 세상에서 최고로 불행한 소년답다. 지구 종말을 막을 방법은 역시 서바이벌 프로그램 <나는 행복하다>에서 7위를 한 오덕휘와 12사도가 이현이 마음을 바꾸도록(지구 종말 소원은 딱 한번 바꿀 수 있다는 역시 황당한 설정) 유도하는 것뿐이다. 지구 종말이 소재이나, 지구 종말을 막는 것이 주제인 셈이다. 캠퍼스 판타지물에 가까운 이 웹툰의 깨알 같은 재미는 ‘너님, 창밖 보셈’(창밖에 종말 뒤 세상이 펼쳐진다)이라고 문자 보내는 ‘신’과 오덕휘와의 메시지 대화다. 묵시록 넘치는 종말론을 비틀어 보면 이만큼 황당한 소재가 없다는 걸 잘 보여주는 경쾌한 작품이다.
시리즈물은 아니지만, 종말 만화에 한 획을 그은 애니메이션도 있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의 ‘지구 종말 3시간 전’ 편이다. 허무, 무의미 개그의 종착역을 보여주는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의 정수다. 애니메이션의 수준은 ‘날림’에 가까울 지경으로 성의없기 짝이 없지만, 재밌다. 물론 심오한 의미 따위는 없다. 지구에 대운석이 다가오면서 진행되는 생방송 버라이어티쇼에는 (원래는 엔카를 싫어했던) 엔카 가수, (욕을 줄줄이 내뱉는) 미소녀 가수, (분신인 인형을 미친 듯이 패는) 복화술사와 (원래는 초능력자인) 마술사가 등장한다. 될 대로 되라며 지구 종말 3시간 전, 각자의 본성을 스스로 까발리는 장면이 배꼽을 잡게 한다.
종말과 관련된 소재로 한 단편소설 22편을 묶은 <종말 문학 걸작선>이 지난 10월 출간됐다. 앞서 이 선집 외에도 <크리스탈 월드>, <최후의 날 그 후> 등이 국내에 소개됐으나, 지금은 절판돼 구하기가 어렵다. <종말 문학 걸작선>은 스티븐 킹과 낸시 크레스 등의 소설로 꾸려졌다. 세계와 인간, 사회, 종교의 종말까지, 이른바 세상의 모든 종말을 다뤘다.
미국 드라마 가운데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탑재한 위성이 미국 유타주의 한 마을에 떨어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바이러스는 결국 미래에서 온 경고임이 밝혀지게 된다. 미래는 바이러스를 박멸할 미생물이 멸종된 세계였던 것이다. 바이러스는 인류 멸망 방지를 위한 신호였던 셈이다.
소설가든 만화가든 지구 멸망과 인류 종말은 놓칠 수 없는 소재이다. 단, 종말론의 재미에 빠지더라도 이것만 염두에 둘 것. 소설은 소설일 뿐, 만화는 만화일 뿐! 정색하지 말자.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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