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감시와 검열이 일상화된 미래사회,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치열한 싸움
감시와 검열이 일상화된 미래사회,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치열한 싸움
민중이 표현의 자유 쟁취를 위한 투쟁을 일으키고, 진압된 지 24년이 흐른 2036년 4월. 정부는 이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경축행사로 대국민 생존 감시 게임 ‘비거 브러더’(Bigger Brother), 일명 비비게임을 열었다. 수도의 16개 구역에서 지역대표가 둘씩 출전하는 이 게임의 규칙은 단 하나. 다른 구역의 참가자를 감시해 보고서를 제출할 것. 보고를 하는 사람은 살고, 보고되는 사람은 죽는다. 상대방의 감시를 위해 카메라와 도청, 미행 등 수단과 방법에 제한은 없지만 들키지 않아야 하고 자신은 다른 참가자의 감시를 피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 게임은 사실상 국가 소유가 된 전국의 방송국 채널을 통해 실시간 중계된다. 단 한명의 생존자를 가리기 위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게임에서 4월19일 현재 남은 사람은 1구역의 ‘나사찰’과 16구역의 ‘한민간’뿐이다. ‘나사찰’의 출신 지역인 1구역은 한때 ‘8학군’이라고도 불렸던 부유층 밀집지역이다.
댓글 하나 달았을 뿐인데
쫓기게 된 주인공 오전 10시 게임 종료 14시간 전 ‘나사찰’은 가뿐한 마음으로 카메라를 집어들고 선글라스를 꼈다. 그가 사는 1구역은 5년 전부터 무장한 사설경비업체가 자체 치안을 하는 곳이라 누구도 신분 노출 없이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만큼 게임에 유리하다. 반면 초췌한 눈으로 잠에서 깬 ‘한민간’은 몸도 마음도 무겁다. 그는 이 게임에 억지로 끌려나왔다. 엄청난 거구인 피그 대통령의 수입 돼지고기 소비 권장 동영상에 “돼지는 딱 질색”이라는 댓글을 단 게 화근이 됐다. 지금까지 2~15구역의 참가자들은 ‘나사찰’의 감시망에 걸려들어 순순히 목숨을 내놨다. 최고의 조직력을 등에 업고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던 ‘쌤송’은 보고도 하지 않은 채 같은 구역 참가자인 ‘설탕공장’을 허술하게 미행하다가 자멸했다. 피그 대통령은 영 마음이 불편했다. 16구역의 한민간이 나사찰의 감시망을 피해 “힘없는 사람을 감시하며 공포를 조장하는 몹쓸 권력”이라고 말하는 게 방송을 탔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기투표 1위를 달리던 15구역 참가자가 며칠 전 제거된 뒤 기습적으로 열린 추모제에서 민중들은 중계된 한민간의 말을 구호처럼 외쳐댔다. 물대포 몇방으로 간단히 진압은 했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할 거라는 동물적 직감이 왔다. 고민 끝에 그는 게임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나사찰에게 강력한 성능의 적외선 카메라와 도청장치를 보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오후 1시 게임 종료 11시간 전 한민간은 지쳤다. 댓글을 단 뒤, 지옥 같았던 나날이 떠올랐다. 지에이치(GH, Grey House) 사람들은 가끔 16구역을 찾아와 “게임에 참가 안 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는 말을 전했다. 울먹이던 그 순간, 그의 스마트폰에서 확인과 동시에 메시지가 삭제되는 불법 에스엔에스(SNS) 서비스인 ‘트윙클’ 문자가 도착했다. ‘힘내요, 조만간 나사찰의 실체가 밝혀질 겁니다.’ 나사찰의 하수인으로 알고 있던 ‘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존재감 없던 한민간의 활약이 부각되면서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트윙클에 ‘희망’이라는 단어의 사용 횟수가 부쩍 늘어났다. 수입 돼지고기 반대 동영상을 내려받기만 해도 바로 지에이치 경호실에 호출당해야 했던 2~16구역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20년 전 법적 사망을 선고받은 뒤 지하로 내려온 해적방송 ‘나꿈틀’에서는 방송 내용과 다른, 게임의 실상을 중계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3구역 ○○가 여친과 호텔방에 있던 중 다른 양다리 여친 급습 후 거친 몸싸움’ ‘7구역 ××, 우아한 커피숍에서 차를 마신 뒤 고급 티스푼을 주머니에 슬쩍 넣음’ 따위의, 방송에 일부 공개된 나사찰의 보고서 내용을 보며 엿보는 즐거움에 도취돼 있던 1구역 사람들마저 시간이 갈수록 냉소와 염증을 드러냈다. 카메라, 도청, 미행
방법은 자유 걸리면 죽는다 오후 6시 게임 종료 6시간 전 좁혀져 들어오는 나사찰의 감시망. 그때 전해져 온 2~16구역 민중들이 보내온 구호물품. 사진이었다. “우리는 너와 함께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물건이었다. 이 사진을 본 대통령은 격분했다. 경기장에만 집중시켜 놓았던 감시 시스템을 경기 전으로 원상복구시켰다. 곳곳에서 감지됐던 반란의 불씨를 다시 한번 물대포로 다스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몇시간 전 상황과는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대통령이 게임에 개입한 정황을 포착한 옛 반란군의 후예들이 만든 ‘돼지를 처단하라!’는 문구를 담은 포스터가 이미 전국에 쫙 깔렸다. 밤 10시 게임 종료 2시간 전 적외선 감시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나사찰. 드디어 한민간을 포착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 보고서가 지에이치에 도착하는 순간 그는 게임 전 은밀히 약속받았던 선물을 손에 넣게 된다. 불법 에스엔에스를 통해 그의 참가 배경을 의심하는 목소리들이 수면에 오르기 전 게임을 끝내야 한다. 그런데 이 순간 한민간은 가만히 서서 카메라를 응시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런 내용으로는 보고를 해봤자, 한민간을 제거할 수 없다. 감시 카메라의 배터리만 점점 닳아갈 뿐이었다. 결국 방전된 감시 카메라, 그사이 사라진 한민간. 밤 12시 게임 종료 예정됐던 대로 승리는 1구역의 나사찰이 차지했다. 그러나 제거됐다고 공식 발표된 한민간의 주검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기장 구역을 벗어나 도주한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2~16구역의 6시간 동안의 반란은 신속히 진압되었다. 피그 대통령은 감시 시스템 강화를 뼈대로 한 안전법을 반수 넘는 1구역 의회 의원의 지지를 등에 업고 신속하게 도입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스템의 겹겹 포위망으로도 ‘희망’은 감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이 글은 판타지 영화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편의 얼개를 차용해 썼다. ‘헝거게임’은 영화 속 가상 독재국가인 판엠이 독재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서바이벌 게임이다. 판타지 영화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독재 체제는 권력 기관의 민간인 뒷조사가 공분을 부르고 있는 우리 현실을 섬뜩하게 은유하는 듯하다. 글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쫓기게 된 주인공 오전 10시 게임 종료 14시간 전 ‘나사찰’은 가뿐한 마음으로 카메라를 집어들고 선글라스를 꼈다. 그가 사는 1구역은 5년 전부터 무장한 사설경비업체가 자체 치안을 하는 곳이라 누구도 신분 노출 없이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만큼 게임에 유리하다. 반면 초췌한 눈으로 잠에서 깬 ‘한민간’은 몸도 마음도 무겁다. 그는 이 게임에 억지로 끌려나왔다. 엄청난 거구인 피그 대통령의 수입 돼지고기 소비 권장 동영상에 “돼지는 딱 질색”이라는 댓글을 단 게 화근이 됐다. 지금까지 2~15구역의 참가자들은 ‘나사찰’의 감시망에 걸려들어 순순히 목숨을 내놨다. 최고의 조직력을 등에 업고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던 ‘쌤송’은 보고도 하지 않은 채 같은 구역 참가자인 ‘설탕공장’을 허술하게 미행하다가 자멸했다. 피그 대통령은 영 마음이 불편했다. 16구역의 한민간이 나사찰의 감시망을 피해 “힘없는 사람을 감시하며 공포를 조장하는 몹쓸 권력”이라고 말하는 게 방송을 탔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기투표 1위를 달리던 15구역 참가자가 며칠 전 제거된 뒤 기습적으로 열린 추모제에서 민중들은 중계된 한민간의 말을 구호처럼 외쳐댔다. 물대포 몇방으로 간단히 진압은 했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할 거라는 동물적 직감이 왔다. 고민 끝에 그는 게임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나사찰에게 강력한 성능의 적외선 카메라와 도청장치를 보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오후 1시 게임 종료 11시간 전 한민간은 지쳤다. 댓글을 단 뒤, 지옥 같았던 나날이 떠올랐다. 지에이치(GH, Grey House) 사람들은 가끔 16구역을 찾아와 “게임에 참가 안 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는 말을 전했다. 울먹이던 그 순간, 그의 스마트폰에서 확인과 동시에 메시지가 삭제되는 불법 에스엔에스(SNS) 서비스인 ‘트윙클’ 문자가 도착했다. ‘힘내요, 조만간 나사찰의 실체가 밝혀질 겁니다.’ 나사찰의 하수인으로 알고 있던 ‘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존재감 없던 한민간의 활약이 부각되면서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트윙클에 ‘희망’이라는 단어의 사용 횟수가 부쩍 늘어났다. 수입 돼지고기 반대 동영상을 내려받기만 해도 바로 지에이치 경호실에 호출당해야 했던 2~16구역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20년 전 법적 사망을 선고받은 뒤 지하로 내려온 해적방송 ‘나꿈틀’에서는 방송 내용과 다른, 게임의 실상을 중계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3구역 ○○가 여친과 호텔방에 있던 중 다른 양다리 여친 급습 후 거친 몸싸움’ ‘7구역 ××, 우아한 커피숍에서 차를 마신 뒤 고급 티스푼을 주머니에 슬쩍 넣음’ 따위의, 방송에 일부 공개된 나사찰의 보고서 내용을 보며 엿보는 즐거움에 도취돼 있던 1구역 사람들마저 시간이 갈수록 냉소와 염증을 드러냈다. 카메라, 도청, 미행
방법은 자유 걸리면 죽는다 오후 6시 게임 종료 6시간 전 좁혀져 들어오는 나사찰의 감시망. 그때 전해져 온 2~16구역 민중들이 보내온 구호물품. 사진이었다. “우리는 너와 함께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물건이었다. 이 사진을 본 대통령은 격분했다. 경기장에만 집중시켜 놓았던 감시 시스템을 경기 전으로 원상복구시켰다. 곳곳에서 감지됐던 반란의 불씨를 다시 한번 물대포로 다스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몇시간 전 상황과는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대통령이 게임에 개입한 정황을 포착한 옛 반란군의 후예들이 만든 ‘돼지를 처단하라!’는 문구를 담은 포스터가 이미 전국에 쫙 깔렸다. 밤 10시 게임 종료 2시간 전 적외선 감시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나사찰. 드디어 한민간을 포착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 보고서가 지에이치에 도착하는 순간 그는 게임 전 은밀히 약속받았던 선물을 손에 넣게 된다. 불법 에스엔에스를 통해 그의 참가 배경을 의심하는 목소리들이 수면에 오르기 전 게임을 끝내야 한다. 그런데 이 순간 한민간은 가만히 서서 카메라를 응시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런 내용으로는 보고를 해봤자, 한민간을 제거할 수 없다. 감시 카메라의 배터리만 점점 닳아갈 뿐이었다. 결국 방전된 감시 카메라, 그사이 사라진 한민간. 밤 12시 게임 종료 예정됐던 대로 승리는 1구역의 나사찰이 차지했다. 그러나 제거됐다고 공식 발표된 한민간의 주검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기장 구역을 벗어나 도주한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2~16구역의 6시간 동안의 반란은 신속히 진압되었다. 피그 대통령은 감시 시스템 강화를 뼈대로 한 안전법을 반수 넘는 1구역 의회 의원의 지지를 등에 업고 신속하게 도입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스템의 겹겹 포위망으로도 ‘희망’은 감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이 글은 판타지 영화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편의 얼개를 차용해 썼다. ‘헝거게임’은 영화 속 가상 독재국가인 판엠이 독재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서바이벌 게임이다. 판타지 영화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독재 체제는 권력 기관의 민간인 뒷조사가 공분을 부르고 있는 우리 현실을 섬뜩하게 은유하는 듯하다. 글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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