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지면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한남동 작은방’ 자료 사진 한컷을 한참 쳐다봤습니다. 칼럼에 언급된, 라일락 나무 가지를 장식한 스노펄 조명 사진이었죠. 지면에 들어간 실내 사진처럼 감각적이지도 않고 백화점 앞의 나무 장식처럼 휘황찬란하지도 않지만 제 생각에는 지난해 최고의 크리스마스 장식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낡고 오래된 주택가. 머물고 싶은 생각보다는 떠나고 싶은 마음들이 더 많을 재개발 구역의 앙상한 나무 위에서 하얗게 빛났을 조명. 먹고살기 팍팍한 사람들이 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그 빛나는 풍경을 보며 잠시나마 따뜻한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요? 저도 그렇습니다. 어둡고 추운 퇴근길 외투 깃에 코를 박고 걸어가다가 어느 집 베란다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트리 조명을 보면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복도 쪽 현관에 둥그런 리스를 걸어놓은 걸 볼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지요. 자신의 것을 남에게 드러내는 많은 행위들이 과시의 냄새를 풍기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크리스마스 장식은 작은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소박한 선의가 느껴져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올해도 구세군 냄비에서 1억원짜리 수표가 발견됐다는 미담이 보도됐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가진 걸 나누려는 실천들이 이래저래 꽁꽁 언 마음을 조금은 녹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꼭 많은 돈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오가는 사람들을 아주 조금씩만이라도 행복하게 만드는 크리스마스 익스테리어는 어떨까요? 우연수집가가 했던 것처럼 소주병 속의 야광스틱도 보는 사람들을 쓱 미소짓게 만들 것 같습니다. 저도 얼른 퇴근해서 엊그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를 베란다 쪽에 내놔야겠습니다.
김은형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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