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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가방은 그 자체로 통과의례다”

등록 2014-01-08 20:30수정 2014-01-12 22:15

전시장 모습.
전시장 모습.
[매거진 esc] 스타일
‘백 이즈 히스토리_가방을 든 남자’ 전시 기획한 이충걸 ‘지큐 코리아’ 편집장 인터뷰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백 스테이지 빌딩에서 ‘백 이즈 히스토리_가방을 든 남자’ 전시회가 개막했다. 지난해 10월부터 2년 동안 9차례에 걸쳐 선보이게 될 연속 기획전 ‘백 스테이지’(Bag stage)의 두번째 전시로서, ㈜시몬느가 내년 9월14일 서울 도산공원 부근에 완공할 글로벌 가방 브랜드 ‘0914’ 플래그십 스토어 개점을 염두에 두고 진행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남자 가방 이야기의 화자이자 아티스트로서 이충걸 <지큐>(GQ) 코리아 편집장이 등장했다. 그는 “지인들에게 선물받은 가방을 보여주고 그 사연과 문화적 맥락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밝혔다. 전시회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 4일 오후, 지큐 사무실에서 이 편집장을 만났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이 잘 쓰는 표현대로 “얍삽하지 않게”, 냉소와 희망을 가로지르며 말 그대로 “유영”했다.

-처음으로 전시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내가 잡지를 만들고 있으니까 남자 가방에 대한 ‘브리태니커적’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위트 있는 해박함이랄까, 보는 사람들에게 난수표처럼 해독할 수 없는 전시가 아니라 즐거운 전시로 보여줄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관람객들도 순수 미술이라기보다 남자 가방을 어떻게 보여주려 했을까라는 봄바람 같은 기대일 뿐일 테니까 부담은 없다.”

-기존 전시회와 차별점은 뭔가?

“작년에 영국 런던 앨버트 뮤지엄에서 연 데이비드 보위전에 갔었는데 전시 자체가 그 사람의 인생의 총량을 보여줄 만큼, 거의 메모지 한장 버린 것 없는 경이로운 전시였는데 관람 행렬이 한동안 런던 거리를 꽤 메웠다. 내가 잡지를 만드는 편집장이라는 지점이 있고, 이것이 세속적인 듯 문화적인 듯하면서도 어딘가에 핵심을 유영해가는 듯한 ‘뉘앙스’로 뭔가 보여주는 직업이기 때문에 이번 전시도 비슷한 재미가 있겠다.”

트렁크백에 턱을 얹고 있는 이충걸 <지큐> 편집장
트렁크백에 턱을 얹고 있는 이충걸 <지큐> 편집장

‘남자에겐 아버지 가방에 대한
추억이 있어.
고통을 아는 어른의 세계.
스타일 저 밖의 우수.
남자가 풍기는 비애를 띤 댄디즘.’

-‘남자의 가방’에 대한 정의를 한다면?

“여자가 가방에 대해 갖는 강박은 지위의 측면이 있는데 남자가 가방에 대해 강요받는 것은 규율적 측면이 있다. ‘회사원이면 감색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처럼. 이번 전시 한 섹션에 쓸 에세이 일부가 있는데, 잠시 읽어드려도 되겠나? ‘남자에겐 아버지의 가방에 대한 추억이 있어. 고통을 아는 어른의 세계. 스타일 저 밖의 우수. 남자가 풍기는 비애를 띤 댄디즘. 가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작은 집을 짓는 것 같아. 그러니까 가방은 그 자체로 통과의례인 셈이야….’”

-듣고 보니 남자 가방이 대단히 지적이고 철학적인 것 같다.

“그런 측면이 있다. 나는 친구들 만날 때 항상 걔가 가방이 없이 오면 ‘너는 그러면 내가 만약 일 있어 늦게 올 때 어떻게 할 거니?’ 한다. 휴대폰만 있고 배터리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가방이 있어야 하는 건 책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어떤 시간을 견딜 수 있어야 된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할 가방들을 설명해 달라.

“한 섹션을 위해 가방을 28개 정도 촬영했다. 백팩이 굉장히 많고 숄더백이나 끈 달린 백도 많다. 비싼 가방들은 아니다. 너무 좋은 가방을 갖고 있으면 숭배하게 되지 않나. 다이아몬드가 정신없이 박힌 시계를 차고 어떻게 설거지를 하겠나. 나는 여전히 백팩이 좋다. 일단 두 팔이 자유롭고, 꼭 달팽이처럼 집을 이고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잘 안 잃어버린다.”

-지금 백팩에는 뭐가 들었나?

“항상 있는 것은 책 3권. 집에서 책을 읽을 때 자꾸 10분쯤 읽다가 기분이 바뀌어 딴 책을 읽고 그러기 때문이다. 요즘 넣어 다니는 책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기독교인이라서가 아니라 항상 예수는 서양문명의 근원이니까. 집 서가에는 신학에 관련된 책이 꽤 우르르 있다. 그다음에 <파트리시아 카스, 내 목소리의 그늘>. 막 읽기 시작했다.”

-나이와 무관하게 오랫동안 매료돼온 가방이 있나?

“빈티지나 사진 가방을 좋아한다. 어릴 때 의사였던 큰아버지가 왕진 가방을 들고 다니셨다. 갈색 가죽 가방에 잠금쇠가 청동빛으로 바랜 그 가방이 내겐 빈티지를 좋아하게 된 계기인 것 같다. 정체가 분명한 빈티지 가방을 드는 것, 아버지 산 좋은 가방 같은, 비싼 옷이 아니라 좋은 옷, 좋은 구두, 좋은 벨트 같은 것은 세월 속에서 마모되고 닳아가는 과정이 주는 아름다움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전시장 모습.
전시장 모습.

-애착을 느끼는 가방이 있나?

“멀버리 숄더백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 박정자(연극인) 선생님이 사주신 거다. 우리가 자주 가던 삼풍백화점 코너에서 보고 예뻐했는데 얼마 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뵈었더니 (목소리 톤을 따라 하며) ‘난 이제 엄마가 없어, 날 위로해줘’라며 내미시더라. 또 하나는 토즈라는 브랜드 회장님인 디에고 델라 발레와 피아르(PR) 디렉터인 오스카 나폴리타노가 선물해준 보스턴백. 내가 이 가방을 예뻐하는지 너무 궁금하다고 해서 답했다. “태어난 게 기뻐. 이렇게 멋진 가방을 들 수 있어서.” 그 친구들과 나와의 서정적인 통역사가 된 가방이다.”

-전시의 또 다른 섹션은 어떤 건가?

“영상 작업은 잘 알려진 남자들이 가방을 든 사진으로 모션 그래픽을 만들었다. 마틴 루서 킹, 프랭크 시나트라, 안철수 등이다. 275c라는 사람에게 영상을 맡겼는데 굉장히 독특하고 흡족하다. 제목은 백(bag)허그. 부제는 ‘그 가방이 담은 것’. 킹 목사의 가방에 담은 건 ‘용기의 크기’, 시나트라가 담은 건 ‘영욕의 지루함’, 안철수가 담은 건 ‘장고 끝에 일수’….”

-‘악수’가 아니라 ‘일수’인가? 흥미롭다. 한국 남성들한테 권하고 싶은 가방은?

“정말 좋은 가죽을 쓴 브리프케이스. 차콜그레이 슈트나 검정 구두, 플란넬 타이처럼 반드시 있어야 하는 아이템인데 한국 남자들은 너무 가방에 대해 늘 소홀하다. 가방에 대한 감각이 생기려면 적어도 평창 올림픽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남자 패션 바뀌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전시에 소개된 가방들.
전시에 소개된 가방들.

“(취향에 대한) 지향이 커지고 있는데 여전히 대한민국은 노인 마초, 어린 마초…. 그들이 그냥 천지에 창궐한달까. 사물에 대해 깊이 인지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인지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자꾸 남의 인생을 갖고 이래라저래라 생사여탈을 좌지우지하는지 모르겠다. 남자가 왜 무스를 발라, 왜 거울을 5분 봐, 왜 청바지를 입고 회사에 와…. 그건 참견해야 할 것도 아니고 고유한 것이지 않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동일 취향을 폭력적으로 강요한다는 측면에 대해 마초라 표현하는 건가?

“그렇다. 강요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존을 지키고 좋은 취향을 갖는다는 건 여전히 굉장히 어려운 거 같다. 시절이 많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좀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좀 다른 얘긴데, 사실 지금은 남자들의 복식 그런 얘기들을 하기에 나 자신이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왜 거리에 침을 뱉지?’ 같은 얘기다. 계란만한 가래를 울궈내서 바닥에 뺨을 때리듯이 철썩하고 때리는 애들 여전히 많은 것처럼…. 어쨌든 나라의 모습이 이럴 때 룩, 스타일을 얘기하는 데 대한 독특한 공허라는 게 있잖나. 그런 기분도 들지만, 하긴 그렇다고 해서 이때 넝마를 입고 다녀야겠나.”

-디자이너 정구호와는 오랜 친구라고 했다.

“크리스마스날 만나 선물하려고 스웨터, 시골에서 올라온 들기름, 우리 엄마가 담근 김치·된장·고추장을 다 담다 보니 보따리가 커졌다. 그 친구가 큰 가방을 갖고 오지 않을 수도 있어서 루이비통 보스턴백에 담았다. 내가 아끼는 가방이지만 여차하면 이 가방을 줘야지 하고 생각하고 줬다. 이번에 전시될 가방인데… (잠시 생각) 내게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고 또 되게 사랑스럽다. 그가 가진 우주의 용량이 나의 10배, 마음 씀의 용량은 20배다.”

-결국 가방은 사람 사이 소통의 매개인가 보다. 이번 전시에서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한다던데.

“내가 가방의 에피소드에 대한 트위트를 쓰면 친구들이 다시 자신의 얘기를 쓰고 하면서 수필 같은 스토리, 문화적 맥락이 나올 것 같아 아이디어로 낸 거다. 전시 첫날부터 시작하는 이 계정의 이름은 아일 비 백(I’ll be bag). 나는 백이 될 거야. 되게 잘 지었지 않나?(웃음) 나도 내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깜짝 놀랐다. 아, 이건 웃자고 한 얘긴데 안 웃겼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정우영·시몬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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