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모습.
[매거진 esc] 스타일
‘백 이즈 히스토리_가방을 든 남자’ 전시 기획한 이충걸 ‘지큐 코리아’ 편집장 인터뷰
‘백 이즈 히스토리_가방을 든 남자’ 전시 기획한 이충걸 ‘지큐 코리아’ 편집장 인터뷰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백 스테이지 빌딩에서 ‘백 이즈 히스토리_가방을 든 남자’ 전시회가 개막했다. 지난해 10월부터 2년 동안 9차례에 걸쳐 선보이게 될 연속 기획전 ‘백 스테이지’(Bag stage)의 두번째 전시로서, ㈜시몬느가 내년 9월14일 서울 도산공원 부근에 완공할 글로벌 가방 브랜드 ‘0914’ 플래그십 스토어 개점을 염두에 두고 진행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남자 가방 이야기의 화자이자 아티스트로서 이충걸 <지큐>(GQ) 코리아 편집장이 등장했다. 그는 “지인들에게 선물받은 가방을 보여주고 그 사연과 문화적 맥락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밝혔다. 전시회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 4일 오후, 지큐 사무실에서 이 편집장을 만났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이 잘 쓰는 표현대로 “얍삽하지 않게”, 냉소와 희망을 가로지르며 말 그대로 “유영”했다.
-처음으로 전시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내가 잡지를 만들고 있으니까 남자 가방에 대한 ‘브리태니커적’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위트 있는 해박함이랄까, 보는 사람들에게 난수표처럼 해독할 수 없는 전시가 아니라 즐거운 전시로 보여줄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관람객들도 순수 미술이라기보다 남자 가방을 어떻게 보여주려 했을까라는 봄바람 같은 기대일 뿐일 테니까 부담은 없다.”
-기존 전시회와 차별점은 뭔가?
“작년에 영국 런던 앨버트 뮤지엄에서 연 데이비드 보위전에 갔었는데 전시 자체가 그 사람의 인생의 총량을 보여줄 만큼, 거의 메모지 한장 버린 것 없는 경이로운 전시였는데 관람 행렬이 한동안 런던 거리를 꽤 메웠다. 내가 잡지를 만드는 편집장이라는 지점이 있고, 이것이 세속적인 듯 문화적인 듯하면서도 어딘가에 핵심을 유영해가는 듯한 ‘뉘앙스’로 뭔가 보여주는 직업이기 때문에 이번 전시도 비슷한 재미가 있겠다.”
‘남자에겐 아버지 가방에 대한
추억이 있어.
고통을 아는 어른의 세계.
스타일 저 밖의 우수.
남자가 풍기는 비애를 띤 댄디즘.’ -‘남자의 가방’에 대한 정의를 한다면? “여자가 가방에 대해 갖는 강박은 지위의 측면이 있는데 남자가 가방에 대해 강요받는 것은 규율적 측면이 있다. ‘회사원이면 감색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처럼. 이번 전시 한 섹션에 쓸 에세이 일부가 있는데, 잠시 읽어드려도 되겠나? ‘남자에겐 아버지의 가방에 대한 추억이 있어. 고통을 아는 어른의 세계. 스타일 저 밖의 우수. 남자가 풍기는 비애를 띤 댄디즘. 가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작은 집을 짓는 것 같아. 그러니까 가방은 그 자체로 통과의례인 셈이야….’” -듣고 보니 남자 가방이 대단히 지적이고 철학적인 것 같다. “그런 측면이 있다. 나는 친구들 만날 때 항상 걔가 가방이 없이 오면 ‘너는 그러면 내가 만약 일 있어 늦게 올 때 어떻게 할 거니?’ 한다. 휴대폰만 있고 배터리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가방이 있어야 하는 건 책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어떤 시간을 견딜 수 있어야 된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할 가방들을 설명해 달라. “한 섹션을 위해 가방을 28개 정도 촬영했다. 백팩이 굉장히 많고 숄더백이나 끈 달린 백도 많다. 비싼 가방들은 아니다. 너무 좋은 가방을 갖고 있으면 숭배하게 되지 않나. 다이아몬드가 정신없이 박힌 시계를 차고 어떻게 설거지를 하겠나. 나는 여전히 백팩이 좋다. 일단 두 팔이 자유롭고, 꼭 달팽이처럼 집을 이고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잘 안 잃어버린다.” -지금 백팩에는 뭐가 들었나? “항상 있는 것은 책 3권. 집에서 책을 읽을 때 자꾸 10분쯤 읽다가 기분이 바뀌어 딴 책을 읽고 그러기 때문이다. 요즘 넣어 다니는 책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기독교인이라서가 아니라 항상 예수는 서양문명의 근원이니까. 집 서가에는 신학에 관련된 책이 꽤 우르르 있다. 그다음에 <파트리시아 카스, 내 목소리의 그늘>. 막 읽기 시작했다.” -나이와 무관하게 오랫동안 매료돼온 가방이 있나? “빈티지나 사진 가방을 좋아한다. 어릴 때 의사였던 큰아버지가 왕진 가방을 들고 다니셨다. 갈색 가죽 가방에 잠금쇠가 청동빛으로 바랜 그 가방이 내겐 빈티지를 좋아하게 된 계기인 것 같다. 정체가 분명한 빈티지 가방을 드는 것, 아버지 산 좋은 가방 같은, 비싼 옷이 아니라 좋은 옷, 좋은 구두, 좋은 벨트 같은 것은 세월 속에서 마모되고 닳아가는 과정이 주는 아름다움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애착을 느끼는 가방이 있나?
“멀버리 숄더백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 박정자(연극인) 선생님이 사주신 거다. 우리가 자주 가던 삼풍백화점 코너에서 보고 예뻐했는데 얼마 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뵈었더니 (목소리 톤을 따라 하며) ‘난 이제 엄마가 없어, 날 위로해줘’라며 내미시더라. 또 하나는 토즈라는 브랜드 회장님인 디에고 델라 발레와 피아르(PR) 디렉터인 오스카 나폴리타노가 선물해준 보스턴백. 내가 이 가방을 예뻐하는지 너무 궁금하다고 해서 답했다. “태어난 게 기뻐. 이렇게 멋진 가방을 들 수 있어서.” 그 친구들과 나와의 서정적인 통역사가 된 가방이다.”
-전시의 또 다른 섹션은 어떤 건가?
“영상 작업은 잘 알려진 남자들이 가방을 든 사진으로 모션 그래픽을 만들었다. 마틴 루서 킹, 프랭크 시나트라, 안철수 등이다. 275c라는 사람에게 영상을 맡겼는데 굉장히 독특하고 흡족하다. 제목은 백(bag)허그. 부제는 ‘그 가방이 담은 것’. 킹 목사의 가방에 담은 건 ‘용기의 크기’, 시나트라가 담은 건 ‘영욕의 지루함’, 안철수가 담은 건 ‘장고 끝에 일수’….”
-‘악수’가 아니라 ‘일수’인가? 흥미롭다. 한국 남성들한테 권하고 싶은 가방은?
“정말 좋은 가죽을 쓴 브리프케이스. 차콜그레이 슈트나 검정 구두, 플란넬 타이처럼 반드시 있어야 하는 아이템인데 한국 남자들은 너무 가방에 대해 늘 소홀하다. 가방에 대한 감각이 생기려면 적어도 평창 올림픽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남자 패션 바뀌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취향에 대한) 지향이 커지고 있는데 여전히 대한민국은 노인 마초, 어린 마초…. 그들이 그냥 천지에 창궐한달까. 사물에 대해 깊이 인지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인지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자꾸 남의 인생을 갖고 이래라저래라 생사여탈을 좌지우지하는지 모르겠다. 남자가 왜 무스를 발라, 왜 거울을 5분 봐, 왜 청바지를 입고 회사에 와…. 그건 참견해야 할 것도 아니고 고유한 것이지 않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동일 취향을 폭력적으로 강요한다는 측면에 대해 마초라 표현하는 건가?
“그렇다. 강요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존을 지키고 좋은 취향을 갖는다는 건 여전히 굉장히 어려운 거 같다. 시절이 많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좀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좀 다른 얘긴데, 사실 지금은 남자들의 복식 그런 얘기들을 하기에 나 자신이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왜 거리에 침을 뱉지?’ 같은 얘기다. 계란만한 가래를 울궈내서 바닥에 뺨을 때리듯이 철썩하고 때리는 애들 여전히 많은 것처럼…. 어쨌든 나라의 모습이 이럴 때 룩, 스타일을 얘기하는 데 대한 독특한 공허라는 게 있잖나. 그런 기분도 들지만, 하긴 그렇다고 해서 이때 넝마를 입고 다녀야겠나.”
-디자이너 정구호와는 오랜 친구라고 했다.
“크리스마스날 만나 선물하려고 스웨터, 시골에서 올라온 들기름, 우리 엄마가 담근 김치·된장·고추장을 다 담다 보니 보따리가 커졌다. 그 친구가 큰 가방을 갖고 오지 않을 수도 있어서 루이비통 보스턴백에 담았다. 내가 아끼는 가방이지만 여차하면 이 가방을 줘야지 하고 생각하고 줬다. 이번에 전시될 가방인데… (잠시 생각) 내게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고 또 되게 사랑스럽다. 그가 가진 우주의 용량이 나의 10배, 마음 씀의 용량은 20배다.”
-결국 가방은 사람 사이 소통의 매개인가 보다. 이번 전시에서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한다던데.
“내가 가방의 에피소드에 대한 트위트를 쓰면 친구들이 다시 자신의 얘기를 쓰고 하면서 수필 같은 스토리, 문화적 맥락이 나올 것 같아 아이디어로 낸 거다. 전시 첫날부터 시작하는 이 계정의 이름은 아일 비 백(I’ll be bag). 나는 백이 될 거야. 되게 잘 지었지 않나?(웃음) 나도 내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깜짝 놀랐다. 아, 이건 웃자고 한 얘긴데 안 웃겼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정우영·시몬느 제공
트렁크백에 턱을 얹고 있는 이충걸 <지큐> 편집장
추억이 있어.
고통을 아는 어른의 세계.
스타일 저 밖의 우수.
남자가 풍기는 비애를 띤 댄디즘.’ -‘남자의 가방’에 대한 정의를 한다면? “여자가 가방에 대해 갖는 강박은 지위의 측면이 있는데 남자가 가방에 대해 강요받는 것은 규율적 측면이 있다. ‘회사원이면 감색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처럼. 이번 전시 한 섹션에 쓸 에세이 일부가 있는데, 잠시 읽어드려도 되겠나? ‘남자에겐 아버지의 가방에 대한 추억이 있어. 고통을 아는 어른의 세계. 스타일 저 밖의 우수. 남자가 풍기는 비애를 띤 댄디즘. 가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작은 집을 짓는 것 같아. 그러니까 가방은 그 자체로 통과의례인 셈이야….’” -듣고 보니 남자 가방이 대단히 지적이고 철학적인 것 같다. “그런 측면이 있다. 나는 친구들 만날 때 항상 걔가 가방이 없이 오면 ‘너는 그러면 내가 만약 일 있어 늦게 올 때 어떻게 할 거니?’ 한다. 휴대폰만 있고 배터리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가방이 있어야 하는 건 책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어떤 시간을 견딜 수 있어야 된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할 가방들을 설명해 달라. “한 섹션을 위해 가방을 28개 정도 촬영했다. 백팩이 굉장히 많고 숄더백이나 끈 달린 백도 많다. 비싼 가방들은 아니다. 너무 좋은 가방을 갖고 있으면 숭배하게 되지 않나. 다이아몬드가 정신없이 박힌 시계를 차고 어떻게 설거지를 하겠나. 나는 여전히 백팩이 좋다. 일단 두 팔이 자유롭고, 꼭 달팽이처럼 집을 이고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잘 안 잃어버린다.” -지금 백팩에는 뭐가 들었나? “항상 있는 것은 책 3권. 집에서 책을 읽을 때 자꾸 10분쯤 읽다가 기분이 바뀌어 딴 책을 읽고 그러기 때문이다. 요즘 넣어 다니는 책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기독교인이라서가 아니라 항상 예수는 서양문명의 근원이니까. 집 서가에는 신학에 관련된 책이 꽤 우르르 있다. 그다음에 <파트리시아 카스, 내 목소리의 그늘>. 막 읽기 시작했다.” -나이와 무관하게 오랫동안 매료돼온 가방이 있나? “빈티지나 사진 가방을 좋아한다. 어릴 때 의사였던 큰아버지가 왕진 가방을 들고 다니셨다. 갈색 가죽 가방에 잠금쇠가 청동빛으로 바랜 그 가방이 내겐 빈티지를 좋아하게 된 계기인 것 같다. 정체가 분명한 빈티지 가방을 드는 것, 아버지 산 좋은 가방 같은, 비싼 옷이 아니라 좋은 옷, 좋은 구두, 좋은 벨트 같은 것은 세월 속에서 마모되고 닳아가는 과정이 주는 아름다움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전시장 모습.
전시에 소개된 가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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