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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 소통, 느슨해서 좋아

등록 2014-01-15 20:29수정 2014-01-16 17:59

학교 동창생들을 찾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가 폐쇄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진화를 낳았다. 네이버는 국내 사용자들의 인기를 바탕으로 외국 시장 진출을 탐색중이다.  김정효 기자 <A href="mailto:hyopd@hani.co.kr">hyopd@hani.co.kr</A>
학교 동창생들을 찾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가 폐쇄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진화를 낳았다. 네이버는 국내 사용자들의 인기를 바탕으로 외국 시장 진출을 탐색중이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밴드 동창회 전성시대
실시간 응답 부담 있는 카톡보다 밴드 게시판 선호되는 이유…쏠림 현상 뒤바뀔까
김아무개(44·공무원)씨는 지난해 11월 네이버 초등학교 동창 밴드에 가입한 뒤 거의 매주 친구들을 만났다. 열명 이상 만나는 대규모 모임이 4번, 소모임 ‘번개’가 2번이었다. 친구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사는 탓에 모임 장소가 서울, 대전, 대구 등 다양해도 먼 거리 마다하지 않는다. 딱지를 싹쓸이해서 친구 녀석을 울렸던 일, 풋풋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어른의 거친 삶’을 위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라는 드라마 속 대사처럼, 새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옛날이랑 똑같네!” 비명까지 질러댄다. 남 보기엔 평범한 아저씨·아주머니들이지만 서로의 눈에는 코 질질 흘리던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김씨는 “10여년 전 아이러브스쿨에서 동창들을 만났는데, 각자 결혼하면서 소홀해지거나 초보 가장, 초보 주부 역할에 바빠 지금 같진 않았다. 지금은 성별을 떠나 팔짱을 껴도 그때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단순한 복고 열풍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 것 같다”며 흐뭇해했다.

지금 동창 밴드의 가장 큰 특징은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쉽게 친구들과 ‘접속’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 온라인 동창회 때처럼 컴퓨터로 누리집에 접속한 뒤 로그인할 필요도 없고, 바쁜 일과 중에도 잽싸게 짧은 댓글을 달 수 있다. 화려한 스티커(이모티콘)로 ‘양념’을 쳐가며 남다른 감각과 유머를 뽐내기도 한다.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개방형 구조가 아니라 친분 없는 누군가 나의 글을 검열하고 살펴볼 것이라는 부담에서도 자유롭다. 온라인 누리집에서 동창 커뮤니티를 이용할 때보다 글이 짧고 속도가 빠르지만 감정의 농도는 더 짙다. 댓글을 달지 않고 무슨 일이 있는지 읽기만 하는 ‘눈팅’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문자나 메신저처럼 대답을 강요받지 않고, 즉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느슨한 관계’는 일과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특히 도움이 된다. 대학 동창 밴드를 하고 있는 주부 전수진(36)씨는 “결혼 전에는 카카오톡을 많이 했지만, 갓난아기를 돌보느라 바빠 즉각적인 대답을 하기 어렵다. 이제는 카카오톡보다 밴드 게시판이 훨씬 편안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보더라도 그동안 오갔던 이야기 흐름을 파악하기 쉽고 나중에 메시지를 확인해도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윤지영 오가닉 미디어랩 대표는 “요즘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언제든지 응답할 준비를 해야 하는 실시간 대화창보다 더 느슨한 구조를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항상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인식이나 부담은 없으면서 언제든 소통할 수 있는 ‘담벼락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하반기 네이버 밴드 동창회가 눈길을 끌기 시작하자, 곧바로 우려가 터져나왔다. 예전 온라인 동창회의 부작용처럼 배우자가 있는 기혼자들간 부적절한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밴드 동창회에 참석한 뒤 심각한 부부싸움 때문에 이혼을 했다거나 이성 동창간의 선을 넘은 관계 때문에 고민하던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괴담’도 심심찮게 나돈다. 남편의 여성 동창들을 비꼬아 일컫는 ‘동창녀’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면서 경계하는 분위기도 뚜렷하다. 남편들 또한 남녀가 격의 없이 어울리는 아내의 동창 모임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며 크고 작은 갈등을 겪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요즘 인터넷 동창회에는 어느 정도 ‘학습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부 사이의 오해나 갈등을 염려해 건전한 관계 형성에 노력하고 서로 조심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실제 중장년 밴드 동창회 안에서는 “회원간 연애를 금지하고, 적발시 퇴출시키는 규칙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한다. “그것까지 막자니 왠지 서글퍼진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기혼자로서 가족 상황과 아이들 교육 이야기, 지금의 사회생활을 일부러 드러내면서 추억과 거리두기 또는 현실 환기를 하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 밴드에 가입한 양아무개(37·회사원)씨는 “초등 밴드 친구들이 현재의 가족사진이나 아이들 사진, 부부 사진을 자신의 프로필로 게재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의 엄마, 누구의 남편과 아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전의 시행착오를 노하우 삼아 지금 동창 모임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있다. 이경주(47·회사원)씨의 초등학교 동창 밴드는 지난해 초가을 이른바 ‘동창 헌법’을 만들었다. 임원진을 따로 두지 않아 특정인이 모임을 주도하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원천봉쇄했고, 매월 정기모임에는 준비위원 3인을 구성하도록 했다. 한 사람이 동창회 비용을 대는 것을 금지하고 이벤트나 모임에는 평등하게 갹출하는 원칙을 세웠다. 정기적으로 납부하는 동창회비도 모금하지 않는다. 저속한 언어나 성적인 이미지 같은 풍기문란 게시물을 올리면 토론을 거쳐 회원을 퇴출시킬 수 있도록 했다. 이씨는 “예전 온라인 동창회와 달리 학습효과가 확실히 있다. 불편한 게시글이나 갈등의 소지가 생기면 제재하는 의견이 바로 올라온다. 균형있게 상호 견제를 하는 어른스러운 중재 문화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규모 온라인 동창회에 여전히 거부감을 나타내는 이도 적지 않다. 오랫동안 연락 한번 하지 않았고, 기억조차 아스라한 수백명의 불특정 동창들에게 개인정보나 사적인 이야기 하기를 꺼리는 것이다. 전교생이 모이는 밴드에서 탈퇴한 뒤 카카오톡이나 메신저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반 모임 같은 작은 모임에만 참여하는 사람도 있다. 이아무개(36·회사원)씨는 “밴드에 가입은 해 있어도 큰 감흥을 못 느낀다. 제대를 한 뒤 아이러브스쿨에 가입해 동창회를 엄청 많이 했지만 돈 문제나 부적절한 연애 등 좋지 않은 사건으로 크게 회의감을 느낀 적이 있다. 나이가 들어서 보니 좀더 맞는 사람들끼리만 만나는 것이 여러모로 편안하다”고 말했다.

이런 문화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까? 윤지영 대표는 “단순히 복고 현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우리의 일상은 이미 오프라인이 따로 존재하지 않을 만큼 항상 온라인 상태로 연결돼 있고, 인연을 중심으로 한 관계와 문화가 중심이다 보니 추억과 스토리텔링을 이어가려는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도구는 도구일 뿐, 친구는 우정과 시간과 경험을 공유하는 ‘실제 관계’다. 초등 밴드 모임을 하고 있는 류세운(43·회사원)씨는 동창 게시판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허용 가능한 일상을 서로 나눈다. 빠른 속도로 소통하면서 멀리 있는 사람들이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작 그렇게 한마디 댓글로 위로하면 끝이다. 오늘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속 세상은 뜨겁고 시끄럽다. 난 오늘도 그 속에서 활발하게 얘기를 나누지만 나랑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내 눈동자를 보지 못한다. 표정을 읽지 못한다. 내 가슴속의 이 아련함을 볼 수 없고 당연히 나눌 길도 없다. 그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친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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