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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상의 게임 스타크래프트, 이젠 안녕

등록 2015-11-11 20:43수정 2015-11-12 10:36

[매거진 esc] 라이프
17년간 이어져온 시리즈 완결판 출시…발매 행사 찾은 수천명, 추억 곱씹으며 “섭섭하다”
“뉴클리어 론치 디텍티드.”(핵무기 발사가 감지되었습니다.)

지난 9일 저녁 7시 서울 삼성동 코엑스 신관 D홀. 이제는 고전이 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모두를 공포에 떨게 했던 핵무기 발사 신호와 함께 예복을 입은 한 남자가 성큼성큼 무대 위로 걸어 올라왔다. 수천명의 관객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는 ‘테란의 황제’ 임요환을 잇는 프로게이머 이윤열이었다. 이날은 그의 결혼식 날이었다.

지난 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스타크래프트2 공허의 유산’ 출시 행사. 블리자드 제공
지난 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스타크래프트2 공허의 유산’ 출시 행사. 블리자드 제공
행사장에서 프로게이머 출신 이윤열의 결혼식이 열렸다. 블리자드 제공
행사장에서 프로게이머 출신 이윤열의 결혼식이 열렸다. 블리자드 제공
수천명의 하객과 함께한 이윤열의 ‘큰 결혼식’은 10일 발매된 스타크래프트의 완결판 ‘공허의 유산’ 출시를 맞춘 이벤트였다. 제작사인 블리자드의 최고경영자 마이크 모하임은 “이윤열 선수의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반려자와 원하는 일 이루며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길 기원한다”는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이날 발매 행사에는 애초 예상했던 2000명보다 훨씬 많은 3000여명이 참석했다. 미리 게임을 구매할 수 있도록 회사는 2500개의 물량을 준비했으나 몇 시간 만에 소진됐다. 블리자드 쪽은 “현장에서 구매를 못하고 돌아간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이윤열의 결혼식이 끝난 뒤에도 이벤트는 계속됐다. 블리자드 본사 게임 개발자와의 만남, 프로게이머 선수들의 이벤트 경기 등 다양한 볼거리가 이어졌다. 관중은 웃고 환호했다. 게임 발매 행사장보다는 ‘파티’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세계 판매량 60% 이상이 한국
대학가 당구장 대체 놀이문화로
스타 프로게이머 등장에도 영향
모바일 게임에 밀려 뒤안길로

이렇게 뜨거운 열기를 보인 것은 이번에 출시된 ‘공허의 유산’이 1998년 3월부터 17년간 이어져온 스타크래프트의 완결판이기 때문이다. 제작사 쪽은 “스타크래프트의 대미”라고 공식적으로 밝힌 상태다. 참석자들은 아쉬움을 나타났다. 40대 회사원이라고 밝힌 한 남성은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학을 하니 당구장은 사라지고 피시방이 들어차 있었다. 공강 시간에 피시방에 삼삼오오 몰려가 스타크래프트를 한 기억이 생생한데 이제 막을 내린다니 섭섭하다”고 말했다.

섭섭한 감정은 스타크래프트로 스타가 된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방송인이 된 ‘테란의 황제’ 임요환은 “프로게이머로서 젊은 시절을 바친 게임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스타크래프트 3 같은 후속작이 나와주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역시 방송인이 된 ‘썸남’ 홍진호는 “스타크래프트는 내 인생에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는데 이제 그 이야기의 완결판이 나온다니 한편으로 섭섭하면서도 설렌다”고 소감을 밝혔다.

스타크래프트가 게임으로서 종결을 선택하게 된 데는 모바일로 재편된 게임 시장이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고성능을 필요로 하는 피시(PC) 게임보다는 스마트폰으로 간편하게 하는 게임을 선호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게임 회사들도 피시 게임보다는 유료 아이템 구매가 많은 모바일 게임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글로벌 게임 시장 조사업체 ‘뉴주’는 지난 4월, 2015년 세계 모바일 게임 시장이 20% 이상 성장하는 동안 피시 게임은 7% 정도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측했다. 행사장에서 “스타크래프트가 정말 끝나는 것이냐”는 질문에 블리자드 쪽 개발자는 “스타크래프트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게임보다는 소설이나 영화 같은 다른 형태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스타크래프트와 스타크래프트 2 사이의 공백이 12년인 것을 봐도 3편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스타크래프트가 남긴 족적은 화려하다. 테란·프로토스·저그라는 가상의 우주 종족이 벌이는 전쟁을 소재로 한 스타크래프트는 세계적으로 1100만장 이상 판매됐다. 그중 60% 이상이 한국에서 팔렸다고 한다. 2010년 7월 발매된 ‘스타크래프트 2 자유의 날개’ 역시 출시 하루 만에 100만장, 한달 만에 300만장, 모두 600만장 이상 판매라는 기록을 남겼다. 스타크래프트 2의 확장판인 ‘군단의 심장’ 또한 이틀 만에 110만장 판매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에서 스타크래프트는 게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학가에서 ‘운동권’ 분위기가 퇴조한 90년대 후반 학번들에게 스타크래프트는 대학 시절 추억의 한켠을 차지한다. 98학번 회사원 정환영(37)씨는 “1학년 1학기까지는 학생회 주최 집회에 참석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2학기 접어들면서 집회가 사라졌다. 갈 곳 잃은 학생들이 피시방을 찾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학생들의 스포츠였던 당구의 몰락도 스타크래프트 열풍과 맞물린다. 97학번 회사원 정상호(38)씨는 “학교 앞에 당구장이 네 군데 있었는데, 불과 한 학기 사이에 모두 피시방으로 바뀌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스타크래프트는 대학 시절 추억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1999년 서울 구의동 테크노마트에서 열린 스타크래프트 게임왕 선발대회(<한겨레> 자료사진).
1999년 서울 구의동 테크노마트에서 열린 스타크래프트 게임왕 선발대회(<한겨레> 자료사진).
당시 통계를 보면, 1998년 상반기 전국 피시방은 100여곳뿐이었다. 그해 4월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됐고, 1년 뒤인 1999년 말 피시방은 5000곳으로 급증했다. 2000년에는 2만1000곳을 넘어섰다. 폭발에 가까운 증가였다. 이는 이(e)스포츠라고 하는 프로게임 문화로 이어졌다. 이즈음 임요환, 홍진호, 이윤열, 기욤 패트리 등 프로게이머 스타들이 탄생했다. 이들은 은퇴 뒤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왜 한국은 스타크래프트에 그토록 열광했을까? 게임 중계 캐스터인 박상현씨는 “경쟁문화”를 꼽았다. 박 캐스터는 “당시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남자였다. 남자들끼리의 묘한 경쟁심을 자극했다. 같은 반 안에서도 농구는 누가 잘하나, 축구는 누가 잘하나 경쟁하지 않나. 대학에서도 당구 칠 때 서로 ‘물리기’ 내기를 한다. 스타크래프트가 남자들의 경쟁심을 자극했다”고 분석했다.

프로게이머의 등장은 일반인들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계기가 됐다. 마치 바둑 애호가들이 조훈현 기사의 바둑을 보고 무릎을 치며 “저게 사람이냐”고 감탄하는 것처럼, 당시 임요환과 홍진호의 환상적 플레이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박 캐스터는 “일단 플레이 자체가 차원이 다르니 사람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만의 독특한 ‘그룹문화’의 반영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내 ‘게임학 박사 1호’인 윤형섭 상명대 대학원 교수(게임학)는 “노래방·찜질방으로 대변되는 그룹문화가 스타크래프트 열풍의 한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미국과 같은 서구에선 ‘게임은 각자 하는 것’이라는 문화가 강한 데 반해, 한국에선 친구들끼리 피시방에 모여 하는 문화라는 것이다.

‘공허의 유산’ 게임 갈무리. 블리자드 제공
‘공허의 유산’ 게임 갈무리. 블리자드 제공
산업적 측면에서의 영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5년께 ‘드라군 놀이’라고 하는 독특한 놀이문화까지 생겨나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누군가 인터넷 댓글로 “하지만 드라군이 출동하면 어떨까?”라고 운을 떼면, 그 밑으로 각기 다른 3명이 ‘드!’, ‘라!’, ‘군!’이라는 댓글을 연달아 올리는 놀이다. 중간에 다른 댓글이 끼어들면 실패다. 드라군은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캐릭터 중 하나다. 드라군 놀이의 핵심은 ‘무의미’다. 아무런 의미 없는 글자의 나열이지만, 스타크래프트를 아는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독특한 놀이문화였다. 스타크래프트 완결판의 제목이 ‘공허의 유산’인 것도 이 때문일까. 드! 라! 군!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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