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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해 문세 형의 ‘소녀’ 부르면 선우 떠올라 가슴 더 뛰어”

등록 2015-12-30 20:55수정 2015-12-31 13:34

[매거진 esc] ‘응답하라 1988’ 등장인물 성보라 가상 인터뷰
2015년 마지막날까지도 드라마 <응답하라 1988>바람이 뜨겁습니다. esc는 등장인물 성보라와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그 시대를, 그리고 오늘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또 이번주 esc 전체를 ‘1988 버전’ 특집으로 꾸며보았습니다.

1989년 겨울 어느 날, 46년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 장충동의 빵집 ‘태극당’에서 성보라를 만났다. 서울대 수학교육학과 3학년(87학번)인 그는 또래 대학생들처럼 <한겨레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태극당 대표 메뉴인 ‘사라다빵’을 먹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기자 돌직구 질문부터 할게요. 별명이 ‘미친×’이던데, 성격이 원래 그래요? 동생 덕선이에게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보라 제 옷을 허락 없이 입는데 가만둬요? 그런 언니는 없어요. 세상의 자매들은 다 그래요. 덕선이는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재주가 있죠. 만나면 다 반해요. 부럽죠. 그런 동생을 저도 좋아하지만 닭살 돋는 표현은 못 하겠어요. 늘 “공부 잘하는 우리 훌륭한 장녀”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직설적이에요. 철이 든 요즘은 반성하고 있어요.

기자 남자친구가 고등학생이네요. 연하남과의 연애 괜찮나요?

보라 벽은 깨지라고 있는 거예요. 유관순 열사의 스승 박인덕(1897~1980) 선생을 아세요? 1930년대 이혼하면서 남편에게 위자료 2천원을 주고 두 딸의 양육권을 가져온 인물이죠. 저도 그런 차원이라고 말하면 될까요?(웃음) 사실, 선우의 따스하고 진실한 박력이 좋아요. 사귀던 남자친구가 내 친구와 바람을 피워서 상처 받았었거든요. 아마 이 얘기를 ‘잘못된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노래 만들면 <가요 톱텐> 1위는 문제없을걸요.

기자 담배는 왜 피워요? 흔치 않은 모습인데.

보라 약간의 운동 차원이죠. ‘여자’라 해서 담배 못 피우게 하면 안 되는 거죠! 복학생 형들이 술자리에서 담배 피우는 여자 후배 보고 상을 엎기도 하는데 웃기는 거죠. 저는 길거리에서 당당하게 피운 적도 있어요. 아저씨들 보라고. 세상은 그렇게 해서 바뀐다고 생각해요.

기자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갑자기 사법시험을 준비한다고요?

보라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공장을 가거나 진보운동을 이어가는 선배나 친구들이 있죠. 저는 법조인이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올해(1989) 5월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창립됐잖아요. 교사가 된 과 선배들도 많이 가입했는데, 정부 탄압으로 1527명의 선생님들이 해직됐어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법조인이 되어 잘못된 현실을 개혁할 겁니다. 조영래 변호사님을 존경하는데, 그분 같은 법조인이 되고 싶어요. 또 다른 이유는 ‘여성’이라는 데 있어요. 경제가 급성장해도 여대생 취업은 쉽지 않아요. 더구나 졸업한 선배들 말을 들으면 이름도 없이 ‘김양’, ‘박양’으로 불린다는데 끔찍하죠.

기자 학생운동 얘기가 나온 김에 기억나는 일화는요?

보라 백골단이 설치는 시위 현장은 진짜 무서워요. 대학생치고 재작년(1987)에 전두환 정권 연장을 막아내기 위해 ‘가투’(가두투쟁) 안 나간 이가 있나요? 한번은 을지로로 동기 남학생과 한 조가 돼서 나갔어요. 전경(전투경찰)들이 몰려오자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담을 넘었는데, 세상에! 전경 한 소대가 있는 거예요. 너무 놀랐죠. 저희는 “데이트하러 왔어요. 쟤들 왜 저래요?” 하고 너스레를 떨었어요. 다행히 소대장이 얼굴에 묻은 최루탄을 씻게 해주고 “이제 학교 돌아가라”는 거예요. 돌아와서는 담 넘을 때 제 엉덩이를 받쳐준 그 남학생이 그걸 무용담처럼 떠들고 다니는 거예요. 죽이고 싶었죠.(웃음) ‘닭장차’(호송차)에서 연애 거는 남학생도 있었어요. 커다랗고 빨간 스카프에 전화번호를 적어달라나 뭐라나. 가장 끔찍한 기억은 명동에서 구호를 외치는데 백골단이 몰려오는 일이에요. 백골단에 잡히면 여학생은 봉변을 당한다는 말이 돌았죠. 냉면집으로 뛰어들어가 낯선 가족들 옆에 딱 붙어서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애걸해 잡혀가지 않았어요. 지금도 가슴이 떨려요.

기자 쌍문동 얘기를 좀 할까요? 보라씨의 집은 반지하죠. 서울로 올라온 서민들은 주로 반지하집과 옥탑방에 살면서 아파트나 정환이네 같은 단독주택으로 이사 갈 꿈을 꾸잖아요.

보라 인근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어요. 정부가 민간 아파트 건설을 유도하려고 이런저런 혜택을 만드는 바람에 1970년대 중반부터 재벌들이 아파트 건설에 뛰어들었잖아요. 60년대까지만 해도 온돌도 없고 장독대도 없어 인기 없던 아파트가 80년대 붐이 일면서 요새 인기예요. 정부가 발표한 분당, 일산 신도시 개발도 한몫하는 거 같고요. 강북에 살던 중산층이 강남으로 이사 많이 가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3년 전(1986) 재개발을 두고 철거반과 세입자, 경찰이 격렬하게 충돌했던 상계동을 기억해요. 아파트 숲이 서민들의 눈물로 지어지는 듯해서 슬퍼요. 아파트로 이사 가면 옆집 꼬마 진주는 어디서 설탕과자를 먹나요? 아줌마들은 어디에 평상 펴놓고 수다를 떠나요? 막내 노을이는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하는데 저는 반대예요.

“덕선이 내 옷 허락 없이 입는데
가만 놔두는 언니는 없어요
사람 마음 사로잡을 줄 아는 동생
표현은 못해도 참 좋아해요”

기자 아파트로 가면 동네 정감 어린 풍경이 사라진다는 말씀?

보라 우리 동네는 ‘서울인 듯, 시골인 듯’ 한 분위기가 있어요. 고민을 다 같이 나누는 지역공동체 같다고나 할까요. 사는 게 각박해도 옆집에 선우가 있고, 정환이가 있고, 아줌마들과 아저씨들이 있어서 힘들지 않아요. 부모님이 없을 때 큰일이 생기면 위층 라미란 아줌마를 찾아가면 돼요.

기자 지난번 선우와 술집 ‘태백산맥’에서 데이트하던데, 주량은? 술버릇은 없나요?

보라 학교 근처 단골집이에요. 선우한테 기습 뽀뽀하기에 이만한 곳도 없지요.(웃음) ‘동지를 위하여’, ‘동지가’ 같은 민중가요를 젓가락 두드리며 목청 높여 불러도 괜찮아요. ‘두부튀김 김치찌개’가 정말 끝내줘요. 양이 넉넉해 다섯이서 코 박고 먹어도 남아요. 소주 안주로 그만이죠. 주량은, 음, 술에 취한 동기들 다 자취방에 배달하고 집에 가요. 술 많이 취하면 문세 형의 ‘소녀’를 불러요. 이 노래 부르면, 선우가 떠올라서 가슴이 더 뛰어요.

기자 올해 프로야구단 해태 타이거즈가 4연속 우승을 노리고 있죠. 야구장 데이트는 안 하나요?

보라 전두환 정권의 스리에스(3S: 스포츠·섹스·스크린) 정책은 공공연한 사실이잖아요. 1981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살빛 찬란한 영화들이 나왔죠. 갑자기 외국 유명 배우들이 우리 책받침이 됐어요. 정치에 대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의도죠. 세상이 더 살 만해지면 야구장 데이트 한번 생각해볼게요.

기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보라 제가 꿈에서 도인을 만났어요. <송곳>인지 머시긴지를 그린 만화가라고 하면서 “서 있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라고 말하더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을 계속 지킬 겁니다. 그러다 보면 진주가 어른이 될 즈음엔 더 나은 세상이 되어 있겠죠.(미소)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사진 tvN 제공

참고자료: <한국 근대사 산책9><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송곳><2005 한국프로야구기록대백과><한겨레신문>전국교직원노동조합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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