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아재개그 전성시대
‘안 웃기는데 들을수록 웃기는’ 아재개그 프로세스 대해부
‘안 웃기는데 들을수록 웃기는’ 아재개그 프로세스 대해부
아재개그로 인기를 얻고 있는 오세득 셰프(오른쪽). 문화방송 <마이리틀텔레비전> 화면 갈무리
이것만 알면 당신도 아재개그 스타
요즘 아재개그는 말장난 문답 위주
한번 들으면 아무도 안 웃지만
계속 듣다 보면 중독되고 만다 반복을 통해 웃음 이끌어내기 최근의 아재개그는 과거의 풍자로부터 멀어졌다. 말 자체만의 장난을 즐기는 시대가 된 것이다. 특히 문답식이 유행이다. 예컨대 ‘딸기가 직장을 잃으면?’ 하고 묻는 식이다. 답은 ‘딸기 시럽’. ‘시럽’과 ‘실업’의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사례다. 아재개그는 한 편만으로 웃음을 터뜨리기 힘들다는 특징도 지닌다. 인터넷 공간에선 수없이 많은 아재개그들이 반복·재생산되고 있다. 단순히 텍스트만으로 이뤄진 것도 있지만, 일본 만화나 유명인 사진에 텍스트를 합성한 ‘짤방’도 많다. 이들 가운데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무리수’도 많다. 하지만 아재개그의 매력은 ‘반복’에 있다. 무리수 아재개그를 한번 들으면 아무도 웃지 않지만,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언젠가 터지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일종의 ‘아재개그 프로세스’가 만들어진 셈인데, 웹툰 작가 이말년은 네이버에 연재중인 웹툰 <이말년 서유기>를 통해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① 들으면 짜증나는데, 듣다 말면 궁금해진다. → ② 들었던 쓰레기 같은 개그가 자꾸 떠올라 지속적으로 내상을 입게 된다. → ③ 그렇게 증오했던 개그를 구간 반복으로 계속 상상하다 보면 웃기기 시작한다.” 안 웃기는 얘기를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궁금증을 자아내게 되고, 결국 웃음이 터진다는 논리다. 반복되는 아재개그를 통해 스타가 된 경우도 있다. ‘셰프테이너’(셰프+엔터테이너)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오세득 셰프다. 그는 <마이리틀텔레비전>, <냉장고를 부탁해> 등 방송에 출연해 아재개그를 반복적으로 던졌다. 처음엔 같은 출연자들조차 그를 질타했지만, 이젠 그의 아재개그에 중독됐다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오세득 아재개그만을 모아 올린 블로그도 여럿 된다. 지난해 <마이리틀텔레비전>에 배우 여진구와 함께 출연해 남긴 아재개그는 유명한 짤방이 됐다. “명절 때 남은 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답은 “전전긍긍”이다. 안 웃겨도 웃어주는 사회로 최근 각광받는 아재개그가 왜 그동안 천대를 받았을까? 웃음을 경시하던 사회 풍조의 반영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평소 웃음이 없는 한국 사회에서 작은 숨통이라도 트이게 하려고 아재개그라도 하면, 웃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한국처럼 개그 하기 힘든 나라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은 잘 웃지 않는다. 개그 프로그램 녹화장에선 방청객들이 ‘어디 한번 웃겨봐라’ 하는 식으로 팔짱을 끼고 출연자들을 째려본다. 녹화 시작 전 웃음을 트이게 하고 많이 웃어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잡이’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아재개그를 무시했던 것도 이런 사회 분위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얘기다. 최근 들어 아재개그로 상징되는 ‘작은 유머’들이 각광받는 건 그만큼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웃음에 대한 관용과 여유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이다. 아재개그가 그 선봉장 구실을 하고 있다. 에스비에스 개그 프로그램 <웃찾사>의 최항서 작가는 “아재개그의 매력은 전문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꼭 웃기지 않아도 된다. 살짝 미소 짓게 하면 된다. 크게 웃기지 않았다고 해서 창피해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직업 개그맨이 아니어도 누구나 시도할 수 있고, 웃기면 좋고 안 웃겨도 그만인 ‘생활 속 개그’, 그게 바로 아재개그의 본질이다. 이제 재미없는 아재개그를 들었을 때 웃기지 않는다고 정색할 게 아니라 분위기 전환을 해보려는 상대방의 노력에 가볍게 미소 지어주는 건 어떨까. 우리의 표정을 만드는 건 남이 아닌 우리 자신이고, 그 웃음으로 행복해지는 것도 결국 우리 자신이니 말이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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