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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해도 반복하면 언젠가 빵 터진다

등록 2016-02-17 20:32수정 2016-02-18 14:52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아재개그 전성시대
‘안 웃기는데 들을수록 웃기는’ 아재개그 프로세스 대해부
아재개그로 인기를 얻고 있는 오세득 셰프(오른쪽). 문화방송 <마이리틀텔레비전> 화면 갈무리
아재개그로 인기를 얻고 있는 오세득 셰프(오른쪽). 문화방송 <마이리틀텔레비전> 화면 갈무리
“이야~, 여긴 회를 먹고 있으니 진짜 회식이네요.” 지난해 12월, 광주광역시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던진 말이다. 반응은 어땠을까? 본인도 민망했는지 “하하~, 아휴 썰렁해라”라고 덧붙였지만, 분위기는 좋았다고 한다. 당시 회식 자리에 있던 한 기자는 “농담 안 할 것 같은 정치인이 한마디 하니, 다들 웃음이 터졌다. 분위기 전환이 됐다”고 말했다. 이 발언 뒤 ‘모범생 안철수가 변했다’는 기사들이 나왔다.

이렇듯 정치인까지 동참할 정도로 ‘아재개그’(아저씨 개그)가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최근의 일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아재개그는 천대와 조롱의 대상이었다. 등산 모임에서 아저씨들이나 할 법한 썰렁한 개그라는 뜻의 ‘등산회 개그’, 재미가 없어 암에 걸릴 것 같다는 의미를 담은 ‘발암 개그’,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던진 썰렁한 농담에 속으론 화가 나도 겉으론 웃어야 했던 직장인의 애환이 서린 ‘부장님 개그’ 등으로 불려온 것이다. 이랬던 아재개그의 위상이 변한 이유는 뭘까? 사람들은 왜 아재개그에 빠져드는 걸까?

원조는 역사 오래된 언어유희

이것만 알면 당신도 아재개그 스타
이것만 알면 당신도 아재개그 스타
아재개그를 단순히 재미없는 개그로만 볼 건 아니다. 아재개그는 핵심은 ‘말장난’으로 일종의 언어유희다. 주로 소리가 같거나, 비슷하지만 다른 뜻을 가진 낱말로 장난을 친다. 다른 나라에도 있다. 영어권에선 ‘펀’(Pun)이라 부르고, 일본에도 ‘다자레’라고 하는 말장난이 존재한다.

그 역사도 유구하다. 성경에도 나온다. 마태복음에는 “너는 베드로이니,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구절이 있다. ‘베드로’(Petros)와 ‘반석’(Petro)의 음가가 비슷한 데서 착안한 언어유희다. 사실 베드로라는 이름 자체가 반석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시씨가 사자를 먹었다’(施氏食獅史)는 시가 유명하다. 언어학자 자오위안런이 지은 것으로, ‘시씨 성을 가진 시인이 사자 열 마리를 먹는다’는 게 내용이다. 꽤 긴 길이의 시인데, 재밌는 건 ‘시’(shi)로 발음되는 글자로만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 시를 낭독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시시시시시~” 하다 끝난다. “시”만 90번 넘게 이어진다. 읽는 이 또한 웃음을 억지로 참는 모습에 배꼽을 잡게 된다.

한국에선 아재개그의 원조로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이 꼽힌다. 그는 언어유희를 통해 수많은 풍자시를 남겼는데, 뜻과 음이 다른 한자 특성을 잘 활용한 고품격 아재개그였다. 어느 날 방랑중인 김삿갓이 한 서당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뒤 지은 시는 말장난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내 일찍이 서당인 줄은 알았지만(書堂乃早知)/ 방 안에는 모두 귀한 분들일세(房中皆尊物)/ 생도는 모두 열명도 못 되고(生徒諸未十)/ 선생은 와서 인사조차 않는다(先生來不謁)’는 이 시를 한문 그대로 읽으면 ‘서당내조지/ 방중개존물/ 생도제미십/ 선생내불알’이다.

언어유희 역사 성경까지 거슬러가
요즘 아재개그는 말장난 문답 위주
한번 들으면 아무도 안 웃지만
계속 듣다 보면 중독되고 만다

반복을 통해 웃음 이끌어내기

최근의 아재개그는 과거의 풍자로부터 멀어졌다. 말 자체만의 장난을 즐기는 시대가 된 것이다. 특히 문답식이 유행이다. 예컨대 ‘딸기가 직장을 잃으면?’ 하고 묻는 식이다. 답은 ‘딸기 시럽’. ‘시럽’과 ‘실업’의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사례다.

아재개그는 한 편만으로 웃음을 터뜨리기 힘들다는 특징도 지닌다. 인터넷 공간에선 수없이 많은 아재개그들이 반복·재생산되고 있다. 단순히 텍스트만으로 이뤄진 것도 있지만, 일본 만화나 유명인 사진에 텍스트를 합성한 ‘짤방’도 많다. 이들 가운데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무리수’도 많다. 하지만 아재개그의 매력은 ‘반복’에 있다. 무리수 아재개그를 한번 들으면 아무도 웃지 않지만,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언젠가 터지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일종의 ‘아재개그 프로세스’가 만들어진 셈인데, 웹툰 작가 이말년은 네이버에 연재중인 웹툰 <이말년 서유기>를 통해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① 들으면 짜증나는데, 듣다 말면 궁금해진다. → ② 들었던 쓰레기 같은 개그가 자꾸 떠올라 지속적으로 내상을 입게 된다. → ③ 그렇게 증오했던 개그를 구간 반복으로 계속 상상하다 보면 웃기기 시작한다.”

안 웃기는 얘기를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궁금증을 자아내게 되고, 결국 웃음이 터진다는 논리다. 반복되는 아재개그를 통해 스타가 된 경우도 있다. ‘셰프테이너’(셰프+엔터테이너)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오세득 셰프다. 그는 <마이리틀텔레비전>, <냉장고를 부탁해> 등 방송에 출연해 아재개그를 반복적으로 던졌다. 처음엔 같은 출연자들조차 그를 질타했지만, 이젠 그의 아재개그에 중독됐다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오세득 아재개그만을 모아 올린 블로그도 여럿 된다. 지난해 <마이리틀텔레비전>에 배우 여진구와 함께 출연해 남긴 아재개그는 유명한 짤방이 됐다. “명절 때 남은 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답은 “전전긍긍”이다.

안 웃겨도 웃어주는 사회로

최근 각광받는 아재개그가 왜 그동안 천대를 받았을까? 웃음을 경시하던 사회 풍조의 반영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평소 웃음이 없는 한국 사회에서 작은 숨통이라도 트이게 하려고 아재개그라도 하면, 웃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한국처럼 개그 하기 힘든 나라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은 잘 웃지 않는다. 개그 프로그램 녹화장에선 방청객들이 ‘어디 한번 웃겨봐라’ 하는 식으로 팔짱을 끼고 출연자들을 째려본다. 녹화 시작 전 웃음을 트이게 하고 많이 웃어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잡이’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아재개그를 무시했던 것도 이런 사회 분위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얘기다.

최근 들어 아재개그로 상징되는 ‘작은 유머’들이 각광받는 건 그만큼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웃음에 대한 관용과 여유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이다. 아재개그가 그 선봉장 구실을 하고 있다. 에스비에스 개그 프로그램 <웃찾사>의 최항서 작가는 “아재개그의 매력은 전문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꼭 웃기지 않아도 된다. 살짝 미소 짓게 하면 된다. 크게 웃기지 않았다고 해서 창피해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직업 개그맨이 아니어도 누구나 시도할 수 있고, 웃기면 좋고 안 웃겨도 그만인 ‘생활 속 개그’, 그게 바로 아재개그의 본질이다.

이제 재미없는 아재개그를 들었을 때 웃기지 않는다고 정색할 게 아니라 분위기 전환을 해보려는 상대방의 노력에 가볍게 미소 지어주는 건 어떨까. 우리의 표정을 만드는 건 남이 아닌 우리 자신이고, 그 웃음으로 행복해지는 것도 결국 우리 자신이니 말이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1 웹툰 <이말년 서유기>에서 설명한 아재개그 반응 과정. ‘참요검’은 원래 요괴를 잡는 칼의 이름이지만 만화에선 아재개그를 뜻한다. 이말년 작가 제공 2 아재개그로 인기를 얻고 있는 오세득 셰프(오른쪽). 문화방송 <마이리틀텔레비전> 화면 갈무리 3 만화와 합성해 재가공한 아재개그 짤방. 인터넷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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