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이 스마트 텐트 ‘프리돔'에 열을 식혀주는 쿨링 모듈을 달고 있다. 코오롱스포츠 제공
레고는 조립식 블록 장난감의 대명사다. 크고 작은 블록을 동그란 구멍에 맞춰 끼우면 집, 학교, 병원, 우주선까지 원하는 건 뭐든지 만들 수 있다. 물론 ‘약간의’ 손재주가 필요하지만. 기자가 어릴 때 보통의 아이들한테선 ‘코코블록’이란 국산 제품이 인기였다. 정품 레고는 언감생심, 언제나 너무 비쌌다. 대신 코코블록을 갖고 놀면서 생각했다. ‘블록으로 건물을 만들고 허무는 것처럼, 세상이 내 마음대로 해체되고 조립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은 현실이 됐다. 바로 ‘모듈’을 통해서다. 모듈은 원래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건축물의 기초 단위를 나타날 때 쓰는 말이었다. 레고나 코코블록의 블록 하나하나도 모듈이다. 집을 짓거나 가구를 조립하거나 기계를 만들 때처럼 모듈은 모여서 조립됐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 완성품이 된다. 그런데 최근엔 이 모듈의 기능성이 강조되면서, 모듈 자체가 제품의 기능을 내 마음대로 확장할 수 있는 도구가 됐다.
일상 속으로 파고든 모듈
모듈형 냉장고 ‘컨버터블 패키지'. 엘지전자 제공
모듈은 우리가 흔히 쓰는 일상의 제품 속으로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엘지전자는 11일 모듈형 냉장고 ‘컨버터블 패키지’를 출시했다. 이 냉장고는 냉장고와 냉동고가 각각 한 칸씩 따로 만들어져 있고, 같은 디자인과 색깔로 나와 원하는 만큼 붙여 쓸 수 있다. 가령 냉동고가 많이 필요한 가정은 냉장고 1대에 냉동고 2대를, 냉장고가 많이 필요한 집은 냉장고 2대에 냉동고 1대를 결합해 쓰면 된다. 마치 레고 블록을 쌓는 것처럼 말이다.
가전제품에 기능 확장을 위한 모듈을 적용하는 데는 큰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드럼 세탁기 밑에 소형 통돌이 세탁기를 붙일 수 있는 제품은 이미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통돌이 세탁기가 부착된 ‘트롬 트윈워시'. 엘지전자 제공
코오롱스포츠는 지난 5월 텐트 최초로 모듈 방식을 채택한 ‘프리돔’을 내놨다. 카이스트(KAIST)와 산학 협력을 통해 개발한 프리돔은 텐트 상단에 원통형으로 디자인한 모듈 시스템을 부착해 기능을 확장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판매중인 모듈은 텐트 내의 탁한 공기를 외부로 배출해주는 공기 순환용 ‘팬 모듈’, 텐트 외부에 자동으로 물을 뿌려 여름철 뜨거워진 텐트 열을 식히는 ‘쿨링 모듈’, 조명 기능과 함께 음악 재생이 가능한 스피커 구실을 하는 ‘사운드 모듈’ 총 3가지다. 겨울철 난방기구로 인한 질식을 염려하고, 여름철 뜨거워진 텐트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있는 캠핑족들은 반색했다. 캠핑 마니아 박영민(37)씨는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다음 텐트 교체할 때 적극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헤드 교체가 가능한 면도기 ‘영킷 업그레이드' 필립스코리아 제공
소형 가전도 예외는 아니다. 필립스의 ‘영킷 업그레이드’ 제품은 ‘스마트 클릭’이란 모듈 방식을 적용했다. 면도기 헤드를 빼서 브러시 헤드를 끼우면 클렌징 제품이 되고, 트리밍 헤드로 바꾸면 이발도 가능하도록 고안된 제품이다. 과거 전기 면도기가 면도 기능만 제공했던 것과는 개념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최근엔 여러 브랜드에서 진동 클렌저에 얼굴이나 눈 주위 마사지용 헤드를 끼워넣을 수 있도록 한 제품도 많이 나왔다.
크고작은 블록 끼워
뭐든 만드는 레고처럼
가전제품·텐트 등에
모듈 끼워 ‘나만의 제품’
스마트폰이 앞장
모듈이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것은 스마트폰 덕분이다. 스마트폰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인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모듈의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장시켰다. 애플리케이션은 스마트폰을 헬스케어 기기에서 게임기까지 원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문가의 손길로 제품을 뜯어서 새 기능을 가진 장치를 장착해야 했던 것이 이제는 ‘터치’ 몇 번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지5'의 다양한 모듈 ‘엘지 프렌즈'. 엘지전자 제공
최근의 모듈화는 간편함이 핵심이다. 하드웨어 모듈도 전문가의 도움 없이 소비자 스스로 탈부착이 가능해졌다. 엘지전자가 지난 4월 출시한 지5(G5)는 세계 최초 모듈 방식의 스마트폰이다. 제품 하단부를 빼서 ‘엘지 프렌즈’라 불리는 다양한 모듈을 끼웠다 뺐다 하는 식으로 기능을 확장할 수 있다. 오디오 기능이 강화된 모듈을 끼워 고해상도 음원을 재생한다든가, 카메라 모듈을 장착해 카메라 성능을 높여주는 식이다. 360도 브이아르(VR) 촬영이 가능한 제품도 있고, 드론을 손쉽게 조종하게 해주는 모듈도 있다. 현재 8개의 모듈이 출시됐는데, 확장성은 무한대나 다름없다.
구글에서도 2013년부터 ‘프로젝트 아라’라고 하는 모듈폰을 개발하려고 연구해왔다. 이르면 올해 안에 제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현재까지 공개된 바로는 중앙처리장치(CPU)나 메인 디스플레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품을 갈아끼울 수 있는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레노버도 프로젝터 기능이나, 고음질 음향 기능을 확장할 수 있는 모듈폰 ‘모토제트(Z)’를 내놓았다. 모듈폰은 이제 시작 단계지만, 향후 스마트폰의 형태가 대부분 모듈형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완성에서 확장으로
단순 부품처럼 취급되던 모듈의 개념이 ‘기능 확장용’으로 탈바꿈한 배경은 개인용 컴퓨터(PC)의 개발과 발전이다. 피시 안에는 ‘확장 슬롯’이 있다. 여기에 고사양의 그래픽 카드나 사운드 카드를 장착해 컴퓨터의 성능을 끌어올렸다. 추가 메모리를 달거나 하드디스크를 더하기도 했다. 이미 완성된 상태로 출시된 제품의 기능 확장 또는 강화를 위해 모듈을 추가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능력을 확장하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이 실현된 셈이다. 엘지전자 관계자는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지 않고 사용자가 직접 만들거나 개성을 추구하는 소비 스타일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데, 모듈 제품은 그 중심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모듈화는 제품을 마음대로 ‘갖고 놀고 싶은’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면서도, 별도의 다른 제품을 사야 하는 부담을 덜어준다. 제품을 만드는 기업 쪽에서 볼 때도 추가 구매를 유도하고, 자사 제품만 사용하도록 하는 ‘잠금 효과’를 누릴 수 있어 이득이다.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 ‘윈윈’하는 셈이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