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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파격 아이템으로 치열한 음식담론 이끌어”

등록 2017-05-17 19:46수정 2017-05-24 11:07

[ESC 10돌 기념호] ESC 초기에 등판한 요리사 박찬일과 소설가 김중혁 10돌 기념 인터뷰
박찬일의 식당 ’광화문국밥’ 앞에 선 김중혁(왼쪽)과 박찬일  박미향 기자
박찬일의 식당 ’광화문국밥’ 앞에 선 김중혁(왼쪽)과 박찬일 박미향 기자

“악어빌딩 지하 레스토랑 ‘시칠리아의 향기’ 사장이자 주방장이 된 박찬일은 영업이 끝나면 매일 3층 피시방으로 향했다. 담배를 이로 깨물고 의자를 뒤로 젖힌 다음, 하루 동안 만난 엿 같은 손님들을 욕하며 게임을 해야 하루를 끝낼 수 있었다.”

김중혁 작가의 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38쪽을 읽다 무심코 포털에 ‘시칠리아의 향기’를 검색해본 독자가 있을지 모른다. 소용없다. 소설이다. 그러나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 한번이라도 서울 서교동 ‘몽로’나 ‘광화문국밥’에서 박찬일 요리사를 봤던 사람은 김 작가와의 연관성을 의심할 법하다. 특히 박 요리사가 실제로 구성진 욕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잡지 <베스트레스토랑>에서 너랑 처음 만난 이야기부터 해야지. 귀걸이를 하고 왔는데 되게 싸가지 없게 생겼더라고. 처음 쓴 기사가 뭐였더라?” 박찬일 요리사가 김중혁 작가에게 물었다. 창간 10주년 인터뷰가 진행된 지난 1일 밤 10시 르메이에르 빌딩 2층 ‘막내낙지’ 불판이 막 달아올랐다. 노동절 휴일이었지만, 박 요리사는 이날도 여기서 멀지 않은 ‘광화문국밥’에서 일하다 왔다.

김 작가가 답했다. “그때 서울 유명 낙지집 예닐곱 군데를 돌고 기사 쓰는 거였죠. 여기(막내낙지)도 왔어요. 6~7곳을 3일 만에 먹어보고 기사를 쓴 거죠. 소설이지 뭐.(웃음) 그 말이 기억나요, 처음 만났을 때 (박 요리사가) 저한테 ‘잘 가르치면 이 구역 접수할 수 있겠다’라고 이야기했죠.”

“사실 나도 (맛) 잘 몰랐어.(웃음) 난들 개뿔 아냐고. 우리 <베스트레스토랑>에서 일했던 게 언제였지? 2004년인가?” 박 요리사가 묻자 김 작가가 답했다. “모르겠어요. 집에 아직도 몇권 갖고 있는데.” 지금은 폐간된 미식전문지 <베스트레스토랑> 2003년 11월호(17호)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유명하지 않던 박 요리사의 이탈리아 음식 칼럼과 그때까지만 해도 소설집 <펭귄뉴스>를 내기 전인 요리기자 김중혁의 서울의 유명 낙지집 12곳 기사가 함께 실려 있다. 2004년 6월호에는 박 요리사가 이연복 요리사를 인터뷰한 기사도 보인다. 그때 38살의 박 요리사는 <베스트레스토랑> 기획위원이었고 32살의 김 작가는 갓 들어온 초짜 요리기자였다.

남색 라운드 긴팔 티를 입고 온 김 작가가 말을 이었다. “<베스트레스토랑>에서 일할 때 제일 충격적인 게, 박 선배(박 요리사)는 매일 놀고 오락하고 술 마시고 그러다 마감날 되면 독수리 타법으로, 그거 하면 정말 시끄럽거든요. 거의 자판을 때려부술 것처럼 쳐요. 독수리 타법으로 30분 동안 수십장을 써내는데 인쇄 대장이 나오잖아요? 아, 글이 너무 좋은 거야, 욕이 나오는 거지, 씨바.”

김 작가의 ‘글이 좋았다’는 평은 사실일 것이다. 반대로 박 요리사가 아직 무명이던 김 작가에게 한 평가도 어긋나 보이지 않는다. 김 작가의 2003년 낙지 기사는 건조한 맛집 정보와 맛에 대한 묘사 가운데서 종종 홀린 듯 ‘사람 사이의 관계’로 향한다. “한국인이 오징어와 낙지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그 씹는 맛 때문이 아닐까? … 낙지를 꼭 2인분씩 파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혼자서 낙지를 먹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낙지는 둘이 상에 앉아서 세상을 이야기하며 먹는 음식이다.”(<베스트레스토랑> 2003년 6월호) 김 작가는 그때 이미 맛 자체보다 사람에게 관심 많은 음식기자였다.

무명 요리사·작가 시절부터
음식 전문잡지 기자로 한솥밥
ESC 창간 때 다시 만나
음식 기자·필자로 맹활약

박, “시장규모 커진 건 긍정적
‘인기 셰프 추종 놀이’도 많아”
김, “한 나라 요식업계 수준은
‘식당 매니저 대우’ 보면 드러나”

그러나 2003년 ‘사수’와 ‘부사수’로 만난 두 사람 관계를 리영희 선생과 <한겨레> 창간세대 기자라든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교동계의 그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카키색 헌팅캡을 쓴 박 요리사가 불판의 낙지를 헤집으며 “<펭귄뉴스>가 말도 안 되게 많이 팔렸어. 태작이 반인데 또 좋은 작품이 반이거든”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눙치면, 김 작가는 특유의 졸린 눈으로 “사실 박 선배 요리는 다 내가 해준 거지”라고 받아친다. 둘은, 좋은 의미의, 친구다.

ESC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익어갔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2007년 5월17일 첫호를 낸 <한겨레>의 라이프스타일 섹션 ESC에서 다시 만난다. 김 작가는 <베스트레스토랑>을 퇴사한 뒤 여행잡지를 거쳐 2006년말 ESC 창간팀에 합류했다. 그동안 쌓은 요리계 인맥과 지식을 ESC에서 살렸다. 한국 잡지계에서 ‘제2의 한창기(<뿌리깊은 나무> 등을 창간한 출판언론인)’로 불리던 고경태 출판국장이 당시 팀장으로 창간 준비를 총책임졌다.

2007년 5월31일치 ESC에 실린 김 작가의 ‘칼의 노래’ 기사가 많이 회자됐다. 김 작가는 <베스트레스토랑> 퇴사 뒤 ESC에 합류하기 전인 2006년 소설집 <펭귄뉴스>를 펴냈고 김유정 문학상을 받았다. 요리기자처럼 취재하고 작가처럼 썼다. “‘칼자루를 누가 쥐고 있는가’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 군인이 칼을 쥐면 세상이 험악해지지만 요리사가 칼을 쥐면 세상이 향기로워진다. 무사의 칼이 불을 뿜으면 여럿 죽지만 요리사 칼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면 맛있는 요리 한 접시가 탄생한다”는 문장은 2007년 다른 종합일간지 음식면이나 음식전문지 어디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수준의 문장이었다. 입길에 올랐다. 이연복, 안효주, 어윤권, 윤정진 요리사 등이 각자 요리와 칼에 얽힌 사연을 말하는 기획기사였다.

“안효주 요리사가 당시 언론 인터뷰 거의 안 할 때였어요. 제가 그때 진짜 여러 번 연락해서 성사된 거예요. 이연복 요리사 등등이 다양한 방식의 칼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서 기사 제목이 ‘칼의 노래’였죠.” 밤 11시 김 작가가 추가로 온 조개탕 국물을 홀짝이며 말했다. 박 요리사는 “칼이고 나발이고 2007년에 요리사의 칼 따위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 안 가질 때야, ESC라서 가능했지”라고 말했다. “인정!” 김 작가가 답한다. 뜨끈한 국물 위로 훈훈한 바람이 불었다.

박 요리사와 김 작가 모두 당시 ESC 요리면이 파격적이었다고 기억했다. 박 요리사는 “충격적인 아이템이 많았지. 사실 초짜 요리사의 연재를 자그마치 40주 동안 오래 연재했고 게다가 한 번 연재할 때 신문 한 면을 다 털어주는 건 파격적인 구성이었어”라고 말했다. 김 작가도 동의했다. “지난 십년간 음식 관련해 가장 큰 변화가 티브이 먹방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ESC는 10년 전에 벌써 음식에 대해 치열한 담론을 낸 거죠. 유행을 5년 앞서갔다고 봐요.”

김 작가는 ESC에서 요리면은 물론 자동차, 남성 패션 등의 여러 분야를 담당했다. <뭐라도 되겠지>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쓴 문학가에게 지나치게 많은 노동량이었지만, 김 작가는 맡은 기사를 다 썼다. 그리고 ESC 창간 넉 달 뒤 퇴사해 다시 전업작가의 길로 돌아갔다.

박 요리사는 2008년부터 약 1년간 이탈리아 요리학교 경험을 담은 에세이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를 연재했다. 박 요리사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접한 누군가는 “박찬일은 배경을 항구와 이탈리아로 바꾼 ‘이문구’”라고 평했다. 가령 이런 문장. “이탈리아 북쪽, 알프스 밑의 요리학교에는 다국적 유엔군처럼 요리사들이 바글거렸다. 북유럽과 독일, 이탈리아에다 아시아 각국이 모였다. 아메리카 대륙은 캐나다부터 남쪽의 브라질까지 빠짐없이 여권 구경을 했다. 혈기 방장한 젊은 녀석들을 두 달간 꼼짝없이 기숙사에 처박아 두었으니 대소동의 연속이었다. … 녀석들 중에 1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선수’들이 즐비했다. 테러분자로 오인받아 입국이 보류되어 뒤늦게 합류한 레바논 녀석은 험악한 생김새와 달리 심성이 착했다. 수업시간이면 조용히 사라져 모자란 잠을 청하느라 아예 별명이 ‘어디 있니’(where are you?)였던 걸 빼면 말이다.”

이런 능청스런 문장의 맛은 박 요리사가 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는 사실이나 1999년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 유학 및 시칠리아 요리 실습을 떠나기 전 오랫동안 잡지 기자 생활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박 요리사가 포복절도할 캐릭터로 유명한 이탈리아 소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의 애독자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유머 감각은 디엔에이(DNA)로 추정된다. 글 쓰는 요리사 혹은 요리하는 글쟁이 박 요리사의 이 연재물은 2009년 9월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김중혁(왼쪽), 박찬일. 박미향 기자
김중혁(왼쪽), 박찬일. 박미향 기자

두 사람에게 “2007년 ESC 창간 이후 10년간 가장 큰 변화가 뭐냐”고 물었다. 대뜸 막걸리를 따르던 김 작가가 “‘몽로’ 아니겠어?”라고 말했다. “응, 몽로가 제일 큰 변화긴 하다. 근데 글 쓰는 솜씨가 더 후져졌어. 사색과 독서가 없으니까. 시간이 없어서.” 박 요리사가 답하자 김 작가가 다시 말했다. “박 선배 아는 사람들은 ‘몽로’가 계속 이어지고 장사 잘되는 점을 다 좋아해요. 다들 기뻐해.”

박 요리사는 2007년 ESC 에세이 연재를 전후로 여러 레스토랑을 옮겨다녔다. 이탈리아 식당 ‘뚜또베네’ ‘논나’ ‘누이누이’, 지금은 사라진 ‘라 꼼마’ 등을 거쳐 2014년 서교동 ‘몽로’를 개업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이탈리아 주점을 표방했다. 박 요리사는 그 시절 양식당의 관행과 달리 한국의 식재료를 활용하고 그것을 메뉴에 그대로 반영했다. ‘통영 앞바다 고등어 파스타’와 같은 박찬일식 명명법은 곧 한국 양식당의 유행이 됐다.

김 작가는 “2000년대 활동한 요리사 세대 가운데 요리를 학술적, 문화적, 인류학적으로 접근한 박찬일 요리사가 중요한 역할을 했죠”라고 말했다. 박찬일 요리사는 ‘몽로’ 광화문점을 열고 최근엔 ‘광화문국밥’을 개업했다. 양식 요리사가 왜 국밥집을 열었을까. “국밥이랑 냉면을 워낙 좋아해요. 좋아하니까 결국 하게 되지.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광의 3단계 알죠? 보다가, 비평하다, 결국 만들게 되잖아. 비슷한 것 같아요. 냉면 국밥 먹으며 이러니저러니 하다 ‘에라 내가 만들자’ 그런 거지.”

두 사람은 지난 10년간 음식업계의 변화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짚었다. 시장 규모가 커진 것은 일단 긍정적으로 봤다. 다만 박 요리사는 아쉬움 섞인 의견을 표했다. “지금 인기 셰프 추종 놀이를 하는 이가 많지만 정작 좋은 식당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은 아직 모자라다고 봐요. 몇몇을 제외하고 지금 이름난 셰프들이 유명한 건 미디어에서 그들을 띄웠기 때문이야. 셰프 스스로가 사람들을 끌어모은 게 아니라고 봐요.”

김 작가는 요식업계의 수준을 ‘매니저에 대한 대접’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멀리서 ‘쨍’ 하고 뭐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 그게 칼인지 포크인지 숟가락인지 바로 아는 전설 같은 매니저들 이야기가 서양에 있죠. 얼마나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손님을 대하는지에 대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한국 식당 매니저는 어떤 대접을 받죠? 지금 ESC에 있었으면 쓰고 싶은 기획이에요”라고 김 작가가 덧붙였다.

“요리사님이 볼 때 김 작가는 뭐가 제일 바뀐 거 같아요?” 질문하지 않는 조건으로 배석한 박미향 현 ESC 팀장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박 요리사가 답했다. “김 작가, 체중 그때(2007년)도 엄청 나갔는데 지금 체중 빠졌지. 음, 그리고 나랑 술 마실 시간이 없어졌어. 내가 옛날 <베스트레스토랑> 할 때 ‘야 술 먹자’ 그러면 꼼짝 못 했거든. 지금 작가님은 바빠서 말을 못해. 술도 좀 마시자.” 김 작가가 답했다. “팟캐스트 ‘빨간책방’도 하고 방송사 고정 게스트도 하고 요새 뭔가 새로운 미션 도전을 제가 많이 하는 것 같아요. 티브이와 라디오 등도 많이 하게 됐어요. 지난해 책을 세 권 내서 책은 꽤 냈구요. 글쎄, 저는 크게 변하지 않는 게 목표니까. 그냥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것 같아요. 다만 그런 생각 많이 하죠. 한국 작가 선배들 가운데 롤모델이 많지 않거든. ‘어떤 식으로 성공하고 어떤 식으로 나갈 수 있다’ 이런 게 없어서 50대 작가가 살아남기 힘들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나’ 생각 많이 해요.”

“지금도 <베스트레스토랑>에서 글 쓸 때랑 그대로인 것 같다”는 김 작가의 말과 달리, 두 사람은 10년간 많이 달라졌다. 글 쓰는 요리사는 2007년 이후 단독 저서만 10권을 냈고 운영중인 식당의 매출은 업계에서 입소문이 났다. 김 작가는 ‘동인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고 단독 저서는 10권이 넘는다. 2014년 박 요리사에 대한 ‘오마주’(경의의 표시)로 자신의 소설에 욕쟁이 요리사 캐릭터를 삽입했다.

11시반 섞어 마신 맥주와 소주병이 점점 늘었다. “이렇게 늙을 때까지 안 변하고 소주 마시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박 요리사가 말했다. “전 한동안 혼술할 때 맥주를 마시다 몸에 안 좋은 것 같아서 싱글몰트 위스키로 바꿨어요. 위스키 사다놓고 온더락 두 잔이면 딱 기분이 좋더라구.”

9년 전 박 요리사의 원고 담당이던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뒤, 아마 2차에서 박 요리사는 언제나처럼 구성진 욕을 섞으며 내가 얼마나 마감 타령을 했는지 짐짓 이탈리아식 과장법으로 수다 떨었을 것이며, 김 작가는 무심한 표정으로 “사실 선배가 늦긴 하죠”라고 눙치며 다시 잔을 건넸을 것이다. 김 작가의 문단 별명은 ‘호모루덴스’(유희의 인간)다. 노동절에 일로 시작한 인터뷰지만 놀이처럼 끝났다. 마치 <베스트레스토랑> 편집실에서처럼. 10년간 두 사람은 많이 변했고,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들을 묶어줬던 ESC도 그들을 닮아 변했고, 변하지 않았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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