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자들 그거 있지 않습니까. 예민해지는 날. 그때는 뭐를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뭐 맛있는 거를 사주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집에서 쉬라 하고 데이트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건지. 여자들이 원하는 건 뭐죠?” 지난달, 20대 초중반의 학생들이 잔뜩 모인 나의 강연장에서 용기있게 손을 든 남학생이 말했다.
여자친구의 몸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은 그 마음이 갸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어딘가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월경 전 증후군이나 월경 기간 중 통증 양상은 개인마다 다 다른데, 왜 무조건 ‘예민해지는 날’로 표현하는 것일까? 맛있는 것을 사준다거나, 집에서 쉬라고 한다는 그 표현은 왜 어딘가 시혜적인 태도로 들리는 걸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월경’을 ‘월경’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저렇게 표현할까?
열네살, 미처 준비하거나 교육을 받을 새도 없이 왈칵 터져버렸던 첫 월경의 당혹감을 선명히 기억한다.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에게 그 소식을 전했을 때 나보다 더 당혹해하던 엄마의 얼굴도. 아빠나 오빠가 알아서는 안 되는 그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엄마가 조용히 옷장 속에서 꺼내준 ‘후리덤’의 기억이 선명하고, 그날 내가 느껴야 했던 당혹감은 일정 부분 영문을 알 수 없는 수치심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건, 그저 생리현상일 뿐인 ‘월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여전히 터부시되고 있다는 거다. ‘마법’이니 ‘그날’이니 하는 정체불명의 용어가 월경이라는 단어를 대체한 지 오래라는 것은 코미디다.
유명 드러그스토어에 가서 생리용품을 구매하면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게 포장해드리겠습니다’라는 과잉 친절이 제공되는 것은 꽤나 상징적이다. 선진국 여성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고 있는 생리컵이 이제야 수입되는 것은, 그 성분이 투명하게 공개된 적 없는 생리대를 25년간 사용해온 처지에 자못 서글프기까지 하다. 월경을 둘러싼 담론은 한번도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고, 이와 더불어 여성의 성적 욕구도 한번도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 그러니 오늘따라 예민하게 대꾸하는 애인에게 이쯤은 안다는 듯 ‘오늘 그날이라서 그래?’라는 말이나 하는 남자들이 생겨나고, ‘애인과의 성관계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했지만 거짓말해본 적이 있다’는 여자가 열명 중 여덟명에 육박하는지도 모르지.
나와 다른 육체를 갖고 태어난 존재를 이해하는 일은 영영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몸에 대한 부당한 편견과 구닥다리 터부가 강하게 남아 있는 사회에선 행복한 관계도 만들기가 어렵다. 월경을 월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가, 생리용품을 구태여 포장해주겠다고 하지 않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래야 여자들이 ‘난 그렇게 하면 못 느껴’라고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된다. 그러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에헴, 내 남은 난자가 모두 수명을 다하기 전까지, 그런 세상이 오기는 올까?
곽정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