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에 있을 때 빈 병을 모아다 팔아 초코케이크를 사 먹곤 했다. 당시 나는 헝가리인 할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민박집에서 살림을 도우며 얹혀살았다. 아침이 되면 여행객들에게 밥을 차려 먹이고, 빈 접시들을 설거지했다. 모두가 관광을 나가 집이 비면 대청소를 했다. 그게 다 끝나야 자유시간이다. 일을 도와주고 그 대가로 밥과 잠자리를 제공받았을 뿐 급여는 없던 나는 자유시간이 되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할머니 아들이 키우는 프렌치 불도그를 데리고 산책 나가 똥을 누이고 돌아와 봤자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어 하릴없이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엠티브이>(MTV)를 보다 잠들었다.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돌아오면 부업으로 술심부름을 했다. 동네 지리를 모르고, 밤에도 문을 여는 마트까지는 버스로 두세 정거장 떨어져 있다 보니 술 생각은 나지만 다녀올 엄두를 못 내는 여행객들을 대신해 갔다 오는 것이다. 원하는 술을 신청받으면 짐바구니가 달린 자전거에 올라타 어둠 속을 가로질러 술을 사 왔다. 이때는 주로 와인을 추천했다. 맥주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헝가리는 와인입니다. 그중에서도 와인의 여왕이라는 ‘또까이’(토커이)를 드셔야 합니다”라고 회유했다. 그래서 대부분 짐바구니엔 양쪽 가득 와인병을 담고 돌아왔다.
영수증도 꼬박꼬박 가져와 확인시키고 잔돈을 돌려주면, 심부름값으로 내게 그 돈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 돈이 쏠쏠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와인병. 주말이 되면 쟁여 두었던 빈 병들을 짐바구니에 담아 공병을 받아주는 마트에 가져가 돈으로 바꿨다. 줄을 서 병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원 헝가리인이었다. 짐바구니 가득 병을 실어 쩔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환전 직원 앞에 서면 “또 너구나. 이번주는 많네”라고 말하며 웃어주기도 했다. 나름 단골이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론 초코케이크를 사 돌아왔다. 숙소에는 나 말고도 엘리자베스라는 직원이 있었다. 말이 직원이지 나이는 환갑이 다 됐고, 끊임없이 욕을 하며 청소를 하고 늘 주인 할머니와 싸웠다. 할머니의 친척이라는 것 같았다. 초코케이크를 들고 숙소로 들어서면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쉬며 “또냐. 미친 초콜릿 보이” 하고 말했다. 기껏 번 돈으로 초코케이크를 사 먹는 내가 한심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청소가 끝나면 우리는 부엌 식탁에 앉아 초코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콜드플레이(영국 록밴드)의 ‘스피드 오브 사운드’(Speed of Sound)가 유행하던 때라 라디오에선 그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는 담배를 피우며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곤 했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서점에서 사온 <영어로 배우는 헝가리어 교재1>을 펼쳐놓고 공부를 했다.
내가 예문을 읽으면 엘리자베스가 발음을 교정해주었다.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면 가래가 끓는 소리를 내며 껄껄 웃었다. 종종 엘리자베스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두 캔 꺼내 하나를 내게 건넸다. 초코케이크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며 헝가리어를 공부했다. 그런 나날이 이어져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하게 되었을 즈음, 엘리자베스는 말했다.
“우리 남편, 미쳤어. 술만 먹어. 젊은 여자 만나. 나는 슬퍼.”
그리고 그녀는 큰 소리로 트림을 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마땅한 헝가리어를 모르는 나는 그저 초코케이크를 한 조각 더 잘라 주었다. 그런 내게 엘리자베스는 “미친 초콜릿 보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