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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토익과 당근 케이크

등록 2017-09-07 08:19수정 2017-09-15 19:07

그림 김보통
그림 김보통

세상에는 당근을 넣어 만든 케이크가 있다. 물론 그쯤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는 몰랐다. 케이크에 당근을 넣다니. 당근 케이크를 처음으로 먹어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런던에서였다.

런던에서 무엇을 했느냐 하면, 토익을 공부했다. 당시 나는 대학 4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로 슬슬 취직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원서를 넣으려면 영어 시험 성적이 필요한데, 그때까지 토익 시험을 본 적이 없었다. 주변 친구들 상당수는 이미 입사에 필요한 점수를 얻어놓고 자격증을 따거나 인턴을 하고 있었다. 팔자 좋게 놀던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래서 특단의 대책으로 영국에서 토익을 공부하기로 했다. 마침 휴학 중 벌어둔 돈이 있던 참이었다.

“영국?” 어머니가 물었다. “영어 공부는 뭐니 뭐니 해도 영국이지.”

터무니없는 나의 말에 어머니는 이견을 달지 못하셨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김치를 먹으려면 한국에 가야 하고, 코알라를 보려면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 가야 하는 것처럼 영어를 배우려면 영국에 가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트렁크에 토익 문제집만 잔뜩 넣어 그대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살며 떠났던 대부분의 여행이 즉흥적이었지만, 이번은 더욱 심했다. 비행기 속에서 ‘이래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오천 번쯤 했을 정도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비 내리는 런던에 도착. 지인이 사는 곳 방 한편에 짐을 풀었다. 즉, 트렁크 가득 든 토익 문제집을 책상에 주르륵 꽂아놓았다. 그러고는 매일같이 토익 공부를 했다. 오전 중엔 듣기 영역(LC), 오후 중엔 읽기 영역(RC)을 공부하고, 피곤할 때면 자리에 누워 피엠피(PMP. 휴대용 멀티미디어 재생 장치.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를 통해 동영상 강의를 보았다.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당연히 대화도 하지 않았다. 문 열고 나가면 지나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에서, 온종일 방 안에 앉아 토익 공부만 했다.

며칠에 한 번씩 식재료를 사러 외출을 할 뿐. 단 한 명의 친구도 사귀지 못했고, 단 한 번의 잡담도 나누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영어를 공부하면서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라곤 “하우 머치?”(How much. 얼마인가요?)와 “생큐”(Thank you. 감사합니다)뿐인 생활. 가끔 견딜 수 없을 때면 ‘네로’라는 카페 체인점에 갔다. 그곳에서 먹은 것이 바로 당근 케이크였다.

이상한 음식이다. 그것이 나의 첫 감상이었다. 커다란 당근이 슬라이스 되어 시트 사이에 끼여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잘게 채를 친 당근이 반죽에 섞여 있어 씹히는 맛도 있고 당근 특유의 달콤함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긴 마찬가지. 누가 케이크에 당근 같은 것을 넣을 생각을 한 것일까. ‘당근에 관한 모든 역사, 진화, 요리와 예술을 집대성한’ 사이버 박물관인 ‘캐럿 뮤지엄’에 따르면, 중세 시대 이전부터 서민들은 단맛을 즐기기 위해 당근을 설탕 대신 케이크에 넣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던 당시의 나는 새끼손톱만한 크기로 잘린 당근이 잘근잘근 씹히는 당근 케이크를 먹으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동네 고시원을 갈걸’이라는 때늦은 후회만 했다.

? 어찌 됐든 약 두 달간의 묵언수행을 끝내고 귀국해 토익 시험을 보았다. 다행히 입사원서를 넣을 수 있는 최저 기준은 넘겼다. 어머니는 친구들에게 “우리 아들이 런던에서 토익 공부 하고 와서 성적 올랐어”라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부끄러웠다. 그 뒤로도 당근 케이크를 먹을 때면 음울하고 쓸쓸했던 런던이 떠오른다.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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